우리를 용서하소서
마틴 루터는 시편 모음 중에서 130편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강조한 사도 바울의 신학을 강조하여 ‘사도 바울의 시’라는 별명을 붙였다. 중세시대 가톨릭교회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였지만, 루터는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시편 130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열다섯 편 묶음 중 하나인데, 다른 노래와 주제가 다르다. 대부분 성전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기쁨을 노래한 반면, 유독 130편만 참회시이다. 사용한 낱말 ‘깊은 곳, 부르짖는 소리, 죄악, 사유(赦宥)하심, 기다림, 속량(贖良)’을 보면 주제의식이 오롯이 드러난다. ‘깊은 곳’은 사람이 겪을 수 없는 괴로운 환경, 위험, 죽음에 직면한 생의 고통 등 두루 의미한다.
교부 어거스틴은 참회하던 당시 자신의 죄를 가리켜 ‘깊은 곳’ 곧 ‘어두운 심연’과 같다고 고백하였다. 삶의 깊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떤 경우 무거운 질병이고, 다른 경우 죄의 볼모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안함이며, 혹은 부자유하게 만드는 억압이나 불의가 지배하는 역사의 혼돈 상태이다. 심리학자들은 그 깊음을 사람의 기억이나 무의식과 같은 심층심리 차원에서 찾으려고 시도한다. 그 마음 너머의 상처까지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깊은 밤, 깊은 어둠, 깊은 절망, 사람들은 그 캄캄함에 직면하면, 당황하고 두려워한다. 믿음의 언어로 표현하면 그 어둠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내 안에 ‘하나님의 부재’는 곧 희망의 부재이다. 더 큰 두려움과 병을 앓는 배경이다. 그 결과 ‘깊은 곳’은 인간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곳이다.
누구에게나 ‘깊은 곳’이 있다. 깊은 어둠, 깊은 두려움, 깊은 고민, 깊은 절망, 깊은 문제에 빠질 수 있다. 기도자가 절망 중에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야말로 그를 절망시킨 죄악보다 더 크게 간섭하셔서, 죄인일망정 자신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내실 줄 믿기 때문이다. 그는 용서를 구하고, 다시 시작할 은총을 구하는 것이다.
‘깊은 곳’은 하나님을 만날 기회이다. 기도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를 믿는다. 그래서 빈손으로, 맨 발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파수꾼이 아침이면 반드시 동이 터 올 것을 알듯이, 하나님께서 참아주시고, 용서해 주실 것을 믿는다.
130편은 시편에서 참회시로 구별된 일곱 편(시 6, 32, 38, 51, 102, 130, 143편) 중 하나이다. 초대교회부터 애송하였고, 12세기부터 수난주간에 기도드렸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는 소요리문답에서 ‘죄의 용서와 화해’를 해설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기꺼이 용서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마음으로 용서는 불가능하다. 용서는 하늘에서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만 감당할 수 있다. 그것이 하늘마음이다. 하나님 앞에 나와 드리는 예배는 바로 하늘마음을 품을 기회이다. 누구나 예배드리는 시간만큼은, 남을 용서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고, 너그러워 진다. 예배드리며 하늘에서 공급하시는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예배는 화해와 용서의 시간이다(마 5:24).
1945년 8.15 광복의 감격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불완전한 해방은 분단을 가져왔고, 우리 민족은 평화로 가는 길에서 공짜가 없음을 값비싼 대가를 치루며 배우고 있다. 남과 북은 너무나 오랫동안 깊은 함정에 빠졌고, 깊은 수렁을 헤매고 있는 중이다. 다만 그 길에서 용서와 화해를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 비극이든 희망이든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품는다면, 더 이상 어리석음과 불순종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