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몇 년 전 연회의 한 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은퇴를 얼마 앞두지 않은 백발의 목사님께서 최근에 당한 모친상을 언급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아가 되었고 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습니다.”
모두가 가볍게 웃어 넘겼지만 아직까지 기억하는 걸 보니 그 표현이 저의 마음에 깊이 와 닿았었나봅니다. 그 멘트를 떠올리며 저는, 사람의 나이가 몇 살이 되었건 간에 누구나 부모 앞에서는 어린 아이일 수밖에 없다는 것과, 누구든지 때때로 고아처럼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새 8월도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계절과 달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마는 8월은 제가 제일 싫어하는 달이 되어버렸습니다. 십여 년 전, 너무나도 덥고 습했던 제주의 8월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너무나도 힘든 기억이었는지라 저는 그 아픔들을 덥고 습한 8월이라는 시간에 흡착시켜버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해결에 준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픔은 아픔대로, 죄 없는 8월의 습한 더위는 그 나름대로 저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아픔은 애초에 해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시간 자체가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가 그나마 그 아픈 기억들을 직면이라도 할 수 있게 해 줄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하나님 운운하는 섣부른 위로나 극복을 향한 인간적인 의지보다는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더 실제적인 힘이 되어주곤 합니다.
그 방법을 제게 알려준 이, 고단하고 우울한 8월에 제가 가장 사랑스레 보듬는 인물은 '미뇽(Mignon)'입니다. 미뇽은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에 등장하는 소녀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고향이 남쪽나라 언저리 정확히 어디인지 아무에게도 말해 주지 않는, 상처와 슬픔을 안고 사는 수수께끼 같은 소녀입니다.
죽기 전 마지막 무대에서 빛나는 하얀 천사 옷을 입은 미뇽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Zwar lebt’ ich ohne Sorg’ und Mühe, doch fühlt’ ich tiefen Schmerz genung./걱정과 수고라곤 모르고 살아왔지만 쓰라린 고통도 참 많이 맛보았지요.” “Vor Kummer altert’ ich zu frühe; Macht mich auf ewig wieder jung!/가슴앓이 하느라 너무 일찍 늙어버렸어요. 저를 영원히 다시 젊게 해 주세요!”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고통을 겪었지만 미뇽은 그 일들로 인해 걱정과 수고를 당하지는 않았노라고 노래합니다. 다만 가슴앓이 하느라 너무나 일찍 늙어 버림을 느끼면서 이제는 영원한 소녀, 우리 모두의 미뇽으로 남고자합니다. “So lasst mich scheinen, bis ich werde, zieht mir das weisse Kleid nicht aus!/참다운 내가 될 때까지 그냥 이내로 빛나게 해 주세요, 이 하얀 옷을 계속 입게 해 주세요!”
우리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해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때로 고아와 같이 이 세상에 버려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고,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아파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숨기고 살기도합니다. 그런 우리 모두는 저마다 애잔한 마음으로 미뇽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를 안고 사는 천사 미뇽은 영원한 소녀의 모습으로 소설의 주인공 빌헬름 뿐만 아니라 삶의 상처에 슬퍼하는 우리를 또 다른 의미의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미뇽의 노래는 많은 작곡가들에게 음악적 영감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소설에는 네 개의 미뇽의 노래가 나오는데 그 중에서 두 번째 노래는 이별의 슬픔에 사무칠 때 마다 제가 자주 부르고 듣는 곡입니다. 슈베르트의 곡은 상처 입은 이들의 영원한 천사인 소녀 미뇽의 목소리를 떠오르게 하는데 그에 가장 부합되는 목소리는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Barbara Bonney)입니다.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도 미뇽의 두 번째 노래에 음악을 입혔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곡은 음악이 너무 아름답기에 시적인 표현을 놓치기가 쉬운데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Elisabeth Schwarzkopf)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곡 피아니스트인 제럴드 무어(Gerald Moore)의 연주를 통해서 그 지고한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Allein und abgetrennt von aller Freude’ 차이코프스키가 의도한 클라이맥스로 인도하되 가장 이상적인 절제력을 보여 주는 것은 제럴드 무어의 대가 다운 곡 해석 덕분입니다. 잠시의 정적 후에 ‘Es schwindelt mir’라고 노래할 때는 그 슬픔과 아름다움의 카타르시스로 인해 듣는 이마저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애간장이 탄다’라는 표현이 독일사람 괴테의 이 시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Es brennt mein Eingeweide), 그리움이란 모든 인간의 공통되고도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이며 이곡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또 다른 이유인 것 같습니다.
가사 하나 하나를 집어 가면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그 아픔을 아는 것처럼, 슈바르츠코프가 부른 미뇽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Nur wer die Sehnsucht kennt,
Weiß, was ich leide!
Allein und abgetrennt
Von aller Freude,
Seh' ich ans Firmament
Nach jener Seite.
Ach! der mich liebt und kennt,
Ist in der Weite.
Es schwindelt mir,
es brennt mein Eingeweide.
Nur wer die Sehnsucht kennt,
Weiß, was ich leide!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나의 아픔을 알거에요!
홀로, 그리고 모든 것과 단절 되어
아무런 기쁨이 없는 나
빈 하늘만 이리저리 바라봅니다
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지금 저 먼 곳에 있네요
어지러워요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아요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나의 아픔을 알거에요!
https://youtu.be/1oEGOCEi37w
조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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