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랙 호크 다운》 (Black Hawk Down, 2001)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최근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고립되었던 남한과 북한의 대사관 관계자들이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를 탈출했던 실제의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모가디슈》가 개봉되었다. 1991년 발발하여 지금까지 30만 명에서 4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낸 소말리아 내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한다. 한국영화 《모가디슈》가 내전 발발 당시 민간인들의 탈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이 내전 속 전쟁 상황을 정면으로 다룬 미국의 전쟁영화가 있으니,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랙 호크 다운》이 바로 그것이다.
시간 상 《블랙 호크 다운》은 《모가디슈》로부터 2년 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1993년 모가디슈에서 소말리아의 민병대 지도자를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운 미군은 이 작전에 매우 낙관적이었다. 그러나 1시간 안에 완수할 수 있다고 자신한 작전은 참혹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납치에 실패하고 모가디슈 한복판에 고립된 미군은 고작 5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18시간의 사투를 벌이며 빠져나와야 했던 것이다. 그 사이 19명의 전사자와 73명의 부상자가 발생되었으며, 헬기 2대가 추락하고 2대가 대파된다.(‘블랙 호크’는 헬기의 별칭으로 ‘블랙 호크 다운’은 헬기의 추락을 의미한다.) 실패의 여파는 컸다. 베트남전 이후 최대의 사상자를 낳은 모가디슈 전투의 여파로 결국 미군은 소말리아에서 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카데미 음향효과상과 편집상을 받기도 한 《블랙 호크 다운》은 전투장면의 사실적인 촬영과 편집으로 이후 현대전을 다룬 모든 전쟁영화의 본보기가 되었다. 다행히도 영화는 전쟁을 소재로 한 미국의 여타 영화들과 달리 영웅주의적으로 미군을 묘사하지도 않고 미국의 우월주의를 표방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조바심으로 인한 지휘부의 판단착오와 실전 상황에서의 혼란스런 지휘체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이로 인해 희생되는 병사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마지막에 등장한 자막, 이 전투에서 1,000명 이상의 소말리아인이 사망했고 19명의 미군 병사가 전사하였다는 설명은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마음을 들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를 볼 때 때때로 마음을 사로잡는 대사나 장면을 발견하곤 하는데, 《블랙 호크 다운》에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남았던 대사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한 병사의 말이었다. 탈출에 성공한 후트는 잠시 숨을 돌리고는 아직까지도 현장에 남아있는 대원들을 위해 다시 투입되기를 자원한다. 우기적우기적 음식을 씹어 넣으며 그는 동료에게 담담하게 그 이유를 설명한다. “고향에 가면 사람들이 묻겠지. ‘이봐 후트, 그 짓을 왜 해? 전쟁이 그렇게 좋아?’ 그러면 난 아무 대꾸도 안 할 거야. 왜냐고? 걔네들은 이해 못 할 거거든. 우리가 왜 싸우는지. 이해 못 할 거야. 바로 옆 사람 때문이란 걸 말이야. 그것 때문이야. 그게 다야.” ‘바로 옆 사람 때문’이라는 말을 한글자막은 거창하게도 ‘전우애 때문’이라고 번역했지만 영어의 원문 대사는 훨씬 간명하고 훨씬 강렬했다. “It’s about the men next.”(이 부분의 영어 자막은 the men next 다음 to you를 첨가했지만 영화 속 배우는 단지 이렇게만 말한다. It’s about the men next. That’s it. That’s all it is.)
The Men Next. 거창한 이념이나 대의 때문도 아니고, 용기와 의무감 때문도 아니며, 국익 때문도 아니다. 모든 것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들이 그렇게 열심히 싸웠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옆의 전우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옆의 사람이다.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 이 사람을 우리는 이웃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무심하게 던진 병사의 말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숨은 다른 의미를 떠올려보도록 만들었다. 어쩌면 단지 내 옆 사람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을 떠올릴 때 거창한 대의나 사상에 휩싸이지 말라는 뜻도 함께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그저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사랑할 뿐, 다른 고상한 의미를 찾아 눈을 돌릴 필요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뜻이 아닐까? 중요하고 결정적인 그 누군가가 아니라, 우연히 지금 내 옆에 있는 바로 이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닐까? 어쩌면 사랑은 그런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다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