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과 고려극장
다시 8.15가 찾아왔다. 해마다 기념하는 광복절은 그 감격이 박제화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사방에 흩어진 고려인, 조선족, 재일동포는 8.15의 감격과 귀향염원을 잊지 못한 채 저마다 사무치는 망향가를 부른다. 아직도 자유롭게 귀국하지 못한 채 타향살이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진정한 광복은 멀기만 하다. 게다가 콘크리트처럼 굳어진 분단의식 때문에 지금은 광복이란 이름조차 낯설게 느껴진다.
올해 광복절을 맞아 마침내 유해를 봉환하는 홍범도(1868.10.12-1943.10.25) 장군에 대한 소식을 듣자니, 여전히 돌아올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1920년 봉오동 전투 영웅의 귀환은 홍범도라는 이름에 대한 회고와 함께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숱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 대한 아스라한 기억까지 불러들일 것이다. 국가가 벌이는 기념비적인 상징 복원이니만큼, 적어도 그래야만 한다. 어느덧 봉오동 전투는 작년에 100주년을 맞았다.
홍범도의 영웅담은 19세기 말의 경계에서 만주와 연해주를 넘나들다가 1937년 가을 어간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구 소련 블라디보스톡에서 하바로브스키에 걸쳐 살던 고려인 18만 명이 그해 8월부터 10월 말 사이 어느 누구 예외 없이 화물열차에 실려 강제로 이주를 당한 것이다. 카자흐스탄사회주의공화국 내무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려인 20,789가구, 98,454명이 90여 차례 화물수송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처량한 난민으로 전락한 고려인의 처지에 홍범도 장군의 경우도 다를 바 없었다. 크즐오르다에 정착한 장군은 고려극장 문지기로 가난한 생계를 이어가던 중 광복을 겨우 2년 앞두고 1943년 생애를 마쳤다. 마지막 시간에 몸 붙이고 살았던 고려극장은 고려인의 타향살이와 민족의식이란 깊은 심금(心琴)을 간직한 문화예술단체였다. 1932년 9월 9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처음 문을 열었고, 강제이주와 함께 카스피 해와 가까운 크즐오르다로 이동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잠시 머물던 크즐오르다에서 마침표를 찍었지만, 고려극장의 역사는 지금껏 간신히 이어간다.
고려극장은 독-소 전쟁 때에 고려인 첫 기착지인 우스또베로 옮겨 다니다가, 우여곡절 끝에 카자흐스탄 수도였던 알마아타에 정착하였다.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의 규모는 25만 명에 이르는 우즈베키스탄이 압도적이나, 그럼에도 고려인 공동체의 중심을 꼽으라면 단연 알마아타가 우위에 든다. 옛 소련연방 어느 곳보다 알마아타가 고려인 사회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까닭은 고려극장을 비롯해 고려신문사(옛 레닌기치)와 대표적인 동포기관들이 소재하기 때문이다. 자치권이 없는 동포들에게 삶의 중심 노릇을 해 온 까닭이었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이전만 해도 연해주 곳곳에는 400여 개의 한인학교와 도서관, 문화단체, 신문과 잡지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끊임없는 탄압과 이주, 정체성의 상실 등으로 이제는 거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래도 홍범도 장군의 마지막 은신처였던 고려극장의 존재감은 남달랐다. 한창 전성기에는 1년에 120여 차례 공연을 열고, 소련연방시절에는 고려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순회공연을 했다고 한다. 냉전시기에도 고려극장 가수들은 불원만리 단파라디오에 실려 날아 온 남한의 노래를 듣고 배워 무대에서 불렀다.
홍범도 장군이 노구의 생계를 걱정하였듯이, 2천 년대 들어 고려극장은 큰 재정난을 맞았다. 소련 연방의 해체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연방에 속한 15개 공화국들이 저마다 독립국가로 분화한 결과 고려인들은 이젠 서로 다른 나라의 국민이 되었다. 비록 몸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스탄 등으로 나뉘어 살았으나, 서로 쉽게 오가며 러시아어를 공유하면서 공동체성을 간직하던 그들이었다. 언어의 벽과 비자의 담은 높았다.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고려인들의 설 땅은 낮아지고, 기회는 좁아 졌다. 삶의 형편이 더욱 군색해진 젊은이들은 러시아의 대도시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
넓디넓은 러시아 땅에 흩어져 살던 고려인 핏줄을 찾아다니며 고달픈 삶과 애환을 위무하던 고려극장 예술인들의 역할은 한계에 다다랐다. ‘국립’(國立) 고려극장의 명예는 파산지경의 경제난과 함께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갔다. 그나마 노래와 춤으로, 연주와 연기로 한민족의 정과 얼을 이어갔던 예술인들은 더 이상 몸 붙일 곳마저 없다. 극장장 김겐나지 씨는 당시 어려운 경제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국가도 바쁘지, 극장도 바쁘지...” 바쁘다는 말은 돈이 없다는 뜻이다.
고려인은 1990년대 초 북방외교로 옛 소련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그 존재가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한국의 방송국마다 앞 다투어 문화예술인을 초청하였고, 언론사들은 결연을 맺었다. 또 멀리 사할린으로 날아가 동포들을 상대로 통곡의 위문공연을 하였다. 아쉬운 것은 ‘그때 뿐’이란 점이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고려인 동포 후손들은 기회의 땅을 찾아 한국을 방문하지만, 겨우 이주노동자 신세일 뿐이다.
해마다 광복절 즈음이면 한인디아스포라의 역사적 삶이 특집방송으로 혹은 다큐멘타리로 구색 맞추기처럼 재탕, 삼탕 소비된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아직도 8.15 광복절을 맞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격세대가 세상 곳곳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어렵사리 국가가 나서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시고 오듯, 잊혀져간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기억하고 현실로 불러내는 일에도 정성을 다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미완의 광복절을 차곡차곡 채우기 위해서이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