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맺는 여름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는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쓴맛을 단맛으로 우려내는 신고(辛苦)의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여름철 자두, 복숭아, 포도와 같은 친밀한 이름에서 느끼듯 열매마다 골고루 맛이 깊고, 속살이 넉넉하다. <새번역>에서 부르는 열매의 이름은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갈 5:22-23)이다. 주렁주렁 아홉 가지 열매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기본적인 인생패키지이다.
열매는 하나같이 알차고 단단하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 인내와 친절과 선함, 신실과 온유와 절제는 추상적인 개념어가 아니다. 오히려 성령의 열매들은 평소 만지고, 누리고, 서로 작용하는 삶의 양식과 같다. 종교적 이상으로 규범화하지 않고, 365일 일상의 복음자리에 머문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쑥쑥 자라나게 마련이다(갈 5:16, 18, 25).
유감스럽게도 열매 맺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종교개혁 시대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1515-1586)는 ‘주님의 포도원’이란 작품을 그렸다. 동산 위에 마주한 두 개의 포도원은 교황의 포도밭과 루터의 포도밭이다. 두 포도밭에서 일하는 농부 사이는 경쟁심리가 가득해 보인다. 한 눈에 보기에도 교황의 포도밭은 황폐하다. 포도나무는 말라 비틀어졌고, 열매가 보잘 것 없으며, 우물에는 돌무더기가 쌓였다. 반대로 루터의 포도밭은 넉넉한 수확으로 기쁨이 가득하다. 크라나흐는 종교개혁 포스터를 통해 ‘나무는 열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따지는 중이다.
열매를 자랑할 만한 인물 가운데 존 웨슬리는 특별한 모범이다. 평소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존은 새벽에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생활을 했으며,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였다. 매주 성만찬에 참석했고,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했으며, 가난한 어린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매주 두 번씩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방문하였다. 존은 매일 최선을 다하면서도 거룩한 습관을 지속하지 못해 안타까워했고, 십자가를 자신 있게 질 수 없다는 것에 고민하였다. 자주 자신의 실수와 실패를 회개하였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존 웨슬리가 체험한 구원의 확신은 우연히 찾아온 영적 순간이 아니었다.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려는 몸부림 속에서, 진실한 삶을 살려는 헌신을 통해 마주친 것이다. 종교적 회심은 감정의 변화에 머물지 않고 변화된 삶으로 나아갔다. 고(高)교회를 민중의 교회로 새롭게 하였고, 영국사회를 개혁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초기 감리교인들은 어린이노동법, 노예교환 폐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사회운동에 앞장섰다. 성령의 열매를 맺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영국의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는 존 웨슬리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복음은 천성으로 가장 교만한 사람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생래적으로는 존 웨슬리보다 더 자만심이 강했던 사람은 다시없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영적 변화를 인격, 성품, 속사람의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관찰한 셈이다. 그 결과는 성령의 열매와 무관할 수 없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겸손히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 육적인 삶에만 매달리지 말고, 영적인 삶을 귀하게 여기고, 신령하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힘쓴다. 일마다 성령의 은사가 필요함을 알고 있으며, 때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려고 한다. 저마다 고유한 오순절이 있음을 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내 안보다 내 밖에서, 교회 안에서보다 교회 밖에서 폭발적인 영향력을 지닌다. 초대 교회가 기대 밖의 놀라운 능력을 얻은 이유는 믿는 사람마다 성령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싸구려 전도용품이나, 사행성 부흥상품 때문이 아니었다.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라는 진실한 열매의 삶은 초대 교회 부흥과 혁신의 열쇠였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