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번번이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은 그 기도의 내용대로 살 마음을 결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교회는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크리소스토무스의 간청을 먼저 드린 후 암송을 시작한다. “오 주님, 우리를 용납하옵소서. 우리가 기쁘고 담대하게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기도를 암송하는 것을 받아 주옵소서.”
습관적으로 주기도문을 암송해온 나는 유감스럽게도 주기도문처럼 살려고 애쓰지 못하였다. 이런 악습은 동서고금이 별로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마틴 루터가 “주기도문처럼 순교를 많이 당한 것은 없다”고 말한 배경이다. 체코 사람 코메니우스가 “주기도문은 아버지의 마음을 여는 최상의 열쇠이다”라고 했음에도 말이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기도를 모델로 삼아야 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주기도문은 기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 기도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 바른 기도를 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참 좋은 기도의 모범답안이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과 나를 기도로 연결하고, 부족한 내 기도를 온전히 완성시키며, 온 세계 그리스도인과 연대하게 한다.
주기도문을 암송하여 고백하는 것은 쉬운데, ‘주기도문처럼 살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주님의 기도에는 삶의 소소한 요구인 ‘일용할 양식’부터 세상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도의 중심이 담겨있다. 주기도문은 뜻도 모르고 중얼대는 이방인들의 주문과 다르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의 간구를 구체적으로 일러주시며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셨다.
남미 우루구와이의 한 작은 예배당 벽에 쓴 주기도문의 구절이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라는 제목인데, 주기도문을 한 구절씩 적고나서 이 구절에 대한 반성을 한마디씩 덧붙여 놓았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여”라고 하지 말아라, 아들과 딸답게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주기도문에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로 가득하다. 주님의 기도를 온전히 내 기도로 삼는 것은 그동안 내가 주어이고, 중심이었던 내 삶에 다시 주님을 모시어 들이는 내면적 개혁을 단행하는 일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행하심대로 사는 일이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든지, 그 모든 기도하는 삶은 예수님과 연결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믿는 구석’이 아닌, ‘믿는 중심’이 있기 때문이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