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쳐나는 과실수
8년 전 처음 이곳에 내려왔을 때 맞이했던 첫 봄. 그해 처음 시작했던 것은 과실청을 담그는 일이었다. 주변이 복숭아 일대여서 자자란 것들은 솎아내어 버린다. 그런 것들을 얻어다가 동량의 설탕을 넣어 으슥한 곳에 보관해놓고 과육이 빠질대로 빠져서 쪼그라들면 분리하여 한여름 무더위에 시원한 얼음물에 타서 마시면 그만한 해갈 음료도 없다.
복숭아 뿐이 아니라 개복숭아, 앵두, 머루, 보리수, 블루베리, 아로니아 그리고 가장 흔히 담갔던 매실 등 열매로 보이는 것들은 닥치는 대로 거두어다가 담갔다. 담글 수 있는 그릇이란 그릇은 모두 꺼내어 담갔다. 주위의 항아리 중에도 쓸만한 것이라면 챙겨다 담갔다. 항아리에 담그면 맛이 더 깊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여 한동안은 항아리를 고이 모시기도 했다. 무슨 정성이 뻗쳤던지 나중에 담글 그릇이 없을 때는 일부러 사다가 담그기도 했다. 그렇게 내리 3년은 매년 이맘 때면 담그고 거르는 일이 연례행사처럼 치러졌다. 혹여 거를 날이 있을까봐 조바심이 나기도 했고, 나무에 달린 열매를 내가 챙기지 않으면 마치 열매에 무슨 못할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 몇 해를 열심히 부지런히 일을 치렀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인가? 창고와 마루를 둘러보면서 넘쳐나는 과실수 그릇들에 마음이 심란했다. 그릇 그릇마다, 크고 작은 통에 가지가지 담겨있는 청들을 보면서 이제는 잠시 쉬어가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담글만한 그릇이 나오지 않고, 보관해 놓을 공간이 없음을 깨닫게 되면서 비움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내리 담갔던 과실수들이 어떤 것은 9년이 된 것도 있고, 짧게는 3년이 된 것이 있었다. 거의 10년 차가 되어가는 것들은 완전 발효가 되어 일명 약이 되었다. 그러나 먹으려고 담근 것인데 그 어느 것도 내 입으로 들어간 적이 없으니 이건 약이 아니라 똥(?)이 되는 셈이다. 더불어 창고에 쌓아놓기만 하고 내놓지 않으니 이 또한 욕심에 불과한 행동이 분명하다. 말로는 정리한다, 비운다 하면서도 이태가 지난 지금도 그저 언제 어떻게 치울 것인지만 머릿속에서 셈하고 있다. 하루 속히 비워야만 새로운 것을 담글텐데 말이다.
작년에는 꽃피는 때에 냉해가 심하게 찾아와 대부분의 과수들이 수정을 못해 열매를 얻지 못했지만 본의 아니게 그 덕(?)에 그해는 어떤 것도 담그지 못하는 비움을 실천했다. 작년 한 해 코로나로 인해 자연의 자성 능력으로 자연이 자연으로 되돌아왔던 것처럼 비록 냉해와 기나긴 비로 수확엔 많은 영향이 있었어도 내 자신에겐 한 텀 쉬고 갈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올해도 그 기운을 이어갈까 한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그릇들을 비어야 할 필요가 있고, 설령 비어낸다 해도 있는 것들을 주위에 나누고 난 뒤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그릇에 담가야겠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그래서 우리 마당에 빨갛게 익은 앵두와 보랏빛 오디가 큼지막하게 달려있어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그 열매들을 모른척하고 있다. 괜히 흔들렸다간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정말 두 눈 딱 감고 무시하고 지나가는게 상책이다. 그 대신 가지치기를 과감하게 하여 열매들을 자유로운 닭들과 공중의 나는 새들의 식사로 주었다. 이렇게 가지치기를 해주면 내년엔 더 굵은 열매로 태어날 수 있다.
그래도 아무것도 담그지 않으니 아쉬운 점이 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랬더니 풀숲 사이에 빨갛게 익어가는 딸기가 보였다. 번지는 속도가 풀과 같아 어느새 소쿠리 한가득 얻을 정도로 번져있었다. 그것들을 따다가 흐르는 물에 휘리릭 씻어 건져내어 물기를 뺀 뒤 설탕에 재어 딸기청을 만들었다. 이틀 정도 냉장고에 넣어두고 그 이후 갈증이 나거나 한밤중에 배가 고플 때 우유나 요플레에 섞어 먹고 있다. 이거라도 하니 연례행사를 거른 아쉬움이 조금은 달래지는거 같다. 아직 유혹하는 과수들이 주위에 많긴 하지만 뭐! 유혹을 당한다 해도 어쩔 수 없지. 남아있는 항아리에 슬그머니 채워 넣으면 되지. ㅎㅎ <끝>
황은경/농촌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