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세 번의 믿음으로
삼위일체주일(Trinity)이다. 삼위(三位)는 세 가지 모습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다.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은 삼위일체주일이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God for us),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God with us) 그리고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God in us)이다.
‘한 분 안에 계신 세 분’을 가장 쉽게 설명한 사람은 아일랜드의 성 패트릭이다. 그가 살던 주후 5세기에 아일랜드는 세상의 끝이었다. 로마를 배꼽으로 했을 때 가장 거리가 먼 곳이었기 때문이다. 영국교회 파송을 받아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한 패트릭은 땅 끝에서 양치는 목자였다.
아일랜드는 척박한 땅이지만, 모래알처럼 흔한 토끼풀(클로버) 덕분에 녹색의 땅으로 불린다. 패트릭은 세 개의 잎사귀로 하나를 이룬 토끼풀을 가리키며 삼위일체 신앙을 설명하였다. 성 패트릭의 현명한 삼위일체 설명 덕분에 클로버는 아일랜드 국화 ‘샴록’(Shamrock)이 되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비록 토끼풀 같은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은 내 인생의 땅 끝까지 사랑하시고, 복을 주신다.
유대교는 ‘하나’(에핫드)를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의 숫자는 ‘셋’이다. 1과 3 두 가지 숫자는 유일신교와 삼위일체 신앙의 차이를 보여준다. 유대인이 오직 하나의 모습이신 하나님만을 믿는다면, 그리스도인은 한 분이며 동시에 세 모습으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도 부인한다. 삼위일체 신앙의 신비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체계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삼’(參)이란 숫자에 대해 강한 신뢰를 지니고 있다. 누구나 새해가 되면 ‘작심3일’이란 말을 한다. 삼을 두 번 겹친 ‘삼 세 번’이란 말은 폭넓은 의미가 있다. 가위 바위 보를 할 때면 ‘삼세번’을 해야 결정이 난다. 누구든 단 한판 승부에 기꺼이 승복하기란 쉽지 않다. 종종 승패에 대한 아쉬움과 시시비비를 불식시키려면 ‘삼 세 번’이 필요하다. 이 때 ‘삼 세 번’은 처음 이긴 승자의 여유와 관대함 때문에 가능하다. 이러한 양보는 지든, 이기든 진정한 승복을 훈련시킨다.
삼이란 숫자의 미덕은 고정되어 있지 않는 역동성 때문이다.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눅 13:33)라며 ‘제3일의 길’ 곧 십자가와 부활신앙을 일깨워 주신다. 성령시대를 가리켜 제3시대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발전과 변화의 의미 때문에 ‘제3의 물결’이란 개념이 쓰이는가 하면, 대안적 의미로 ‘제3세대’니, ‘제3의 길’이니 라는 말도 사용한다. 늘 대안적 모습을 찾는 모색을 ‘제3의 신앙’이라고 한다면, 성찰을 통해 ‘회개 용서 구원’의 ‘삼 세 번의 신앙’을 배운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를 ‘준비’할 것을 주문하였다. ‘설교할 준비, 이사할 준비, 죽을 준비’이다. 여기에서 준비란 인간적인 집착이나 업적주의를 버리고 자신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려는 삶의 태도이다. 젊은이들의 신앙공동체 떼제(Taize)는 ‘기쁨 소망 자비’, 세 가지를 지향한다. 수도자들의 삶이 남다른 것은 그들이 선택한 ‘청빈 독신 순명’이란 세 가지 신앙덕목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숫자 삼(3)은 똑 부러지게 요약하고, 정리하여, 분명한 좌표를 제시하는 힘이 있다. ‘황금 삼각형’ 꼴의 논리는 자기주장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는데 대단히 유용하다. 옛말에 ‘정립’(鼎立)이란 말이 있다. 솥의 발이 셋이란 의미인데, 그래야 쓰러지지 않고 안정되게 서 있다는 의미이다. 삼위일체의 ‘정립(鼎立)형 신앙’은 든든하고 안정된 고백을 느끼게 한다. 사도 바울은 신앙의 세 가지 원리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고전 13:13)를 강조하였다.
내 인생에 소중한 의미를 세 가지로 요령껏 정리해 보면 즐겁다. 신앙생활이든, 삶의 원칙이든, 미래의 비전이든 3가지로 꼽는다면 남달라 보일 것이다. 아마 자신이 지닌 남 다른 특별함은 스스로 선택한 그런 핵심가치 때문이다. 모처럼 맞은 ‘거룩한 셋’을 상기하는 새 절기에 내 소중한 삶의 목표와 원칙과 의미를 헤아려 보자. 복 있는 삶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