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있는 존
존 웨슬리는 자기 시대에 신실한 증인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교파 이전에 하나님 나라요, 성경적 삶이었다. 복음에 대한 그런 태도 때문에 영국국교회인 성공회를 떠나고,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당시 제도교회와 사회적 부조리와 몸으로 부딪혀 싸웠던 존은 지금도 우리 곁에 존재한다.
웨슬리의 친구들은 소수의 무리와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루었고, 성령의 감동으로 광장과 거리, 광산과 감옥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용기 있는 믿음과 두려움 없는 사랑의 힘으로 영국사회와 교회를 개혁하였다. 당시 영국에서 감리교인은 가장 정직한 사람으로 불렸다. 하나님의 말씀과 경건생활을 목숨처럼 소중히 지켰기 때문이다.
교파 천국인 미국에서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진실한 생활은 감리교인을 배우라. 체험적 신앙은 침례교인을 배우라. 교회충성은 루터교인을 배우라. 교인의 긍지는 성공회를 배우라. 단순한 믿음은 퀘이커교도를 배우라. 종교를 높이는 태도는 유대교를 배우라. 기도생활은 장로교인을 배우라. 봉사생활은 구세군을 배우라. 교회를 널리 드러냄은 천주교를 배우라. 기쁨에 찬 신앙은 흑인들에게 배우라.’
감리교회의 특징으로 꼽은 ‘진실한 생활’은 웨슬리의 유산이다. 존 웨슬리는 신앙생활에서 엄격한 규칙쟁이였다. “만일 우리 중에 이것을 지키지 아니하거나 이 중의 어느 하나라도 습관적으로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영혼을 감독하는 이에게 알리어 이유를 밝히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의 행실의 그릇된 것을 훈계할 것이며, 한동안 인내하며, 그에게 시간을 줄 것이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는 우리와 함께 할 자리가 없다.”
존 웨슬리는 신앙의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경건의 훈련(Works of Piety)과 사랑의 실천(Works of Mercy)이란 두 바퀴를 강조하였다. 한 사람과 온 사회를 성화시키려면 복음적 삶의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앙실천을 통해 ‘이론의 종교를 은총의 종교로, 머리의 종교를 가슴의 종교로, 입술의 종교를 삶의 종교로, 의인의 종교를 죄인의 종교로’ 바꾸어 냈다는 평가를 듣는다.
사실 존 웨슬리는 특별한 교파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남긴 유언이다. “하나님께서 감리교인을 불러일으키신 목적은 어떤 새로운 교파를 세움이 아니요 먼저 교회를 개혁하고, 민족을 개혁하고, 성서적 성결을 온 땅에 전파하는 것이다.” 감리교회는 교리를 기초로 교파를 제도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존 웨슬리는 교리를 설교에 담아냈다. 말씀 안에 담아낸 표준교리라고 할 수 있다.
1763년에 완성한 네 권의 설교집을 ‘표준설교’라고 부른다. 모두 44편에는 감리교회의 신학과 교리가 담겨있다. 절반의 주제는 ‘믿음, 죄, 회개, 칭의. 신생, 성령의 증거, 성화, 완전’ 등 감리교 신앙의 바탕이 되는 고백이고, 나머지 절반은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내용으로 한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과 생활윤리이다. 웨슬리는 메도디스트다운 변화된 삶, 경건한 성화의 삶을 누누이 강조한다.
1900년대 초 미국 그리스도교 풍속도를 반영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은 감리교인을 가리켜 ‘읽을 줄 아는 침례교인’이라고 빗대고 있다. 감리교회는 일찍이 설교의 ‘표준’을 정한 덕분으로 엉뚱한 성경이해와 상식을 벗어나는 일탈을 막을 수 있었다. 애초에 존 웨슬리가 광신을 경계하고, 이성의 역할을 중시한 덕분이다.
영국의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는 존 웨슬리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복음은 천성으로 가장 교만한 사람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생래적으로는 존 웨슬리보다 더 자만심이 강했던 사람은 다시없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회심 기념주일이다. 그는 가슴에 담은 따듯한 불씨로 평생 하나님을 바르게 설명하고, 참되게 사랑하기 위해 헌신하였다. 지금 메토디스트 운동은 존의 뜨거운 가슴을 통해 시작된 신앙의 리바이벌운동을 다시 재점화 할 시점을 지나고 있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