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고 고마운 생명들
지난주 못자리를 낸 뒤 논농사는 모가 자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길곁에 있는 우리 논을 지날 때마다 눈은 저절로 하얀 부직포를 씌운 못자리에 간다. 얼마나 자랐을까? 지난밤 추위에 냉해는 입지 않았을까? 물은 잘 들어가고 있나? 등 아이를 보듬는 엄마의 마음처럼 눈여겨본다. 엊그제만 해도 부직포가 바닥에 바짝 붙어있었는데, 어제 쏠쏠찮게 내린 비로 모가 자랐는가 보다. 오늘 읍내에 나가면서 논을 봤더니 부직포가 조금 올라온 듯 싶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못자리 옆으로 요즘 백로와 왜가리와 오리가 한가로이 노닌다. 백로는 아직 어려보이고, 왜가리는 암수가 정답게 사랑을 나누다가 내가 휴대폰을 켜는 순간 힘찬 날개짓을 하며 훨훨 날아가버린다. 날아가는 백로나 왜가리를 붙잡으려 아무리 줌을 하며 찍어대지만 원하는 만큼의 화질을 얻지 못하여 못내 아쉽다. 가끔 오리 가족들을 만난다. 유유히 흐르는 논에 새끼 오리들을 보호하며 유유자적 노는 모습을 보면 참 예쁘고 평화롭다. 이 녀석들도 나의 휴대폰 앞에서는 몸둘 바를 몰라 서둘러 논둑으로 올라가 버린다. 그리고는 저만치 숨어버린다. 오리의 모성과 부성이 얼마나 애틋한지, 한번은 가까이 가서 오리를 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숫오리가 무리 반대편으로 가면서 꽥꽥 소리를 냈다. 왜 그런가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니, 엄마오리는 새끼오리들을 데리고 풀숲으로 들어가 숨고 아빠오리는 나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유인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부터 가까이 가서 보려 하지 않고 멀리 서서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자기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매한가지임을 본다.
백로와 오리뿐이랴. 내가 만나는 논의 생물들은 다양하다. 농약을 아예 치지 않기 때문에 어느날부터 우리 논은 다양한 종류의 생물들 서식지가 되었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지난번 논둑을 정리할 때는 굵고 긴 미꾸라지 떼를 만났다. 논 깊숙이 서식하고 있다가 포크레인 노크에 화들짝 놀라 튀어나온 것이 서식지 이탈이 된 것이다. 윗논에서 아랫논으로 강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재도 만났다. 도룡뇽 알도 보았다. 미꾸라지와 가재는 바삐 움직일 힘이 있어 괜찮았지만, 도룡뇽 알은 가만히 두었다가는 흙에 묻힐 것 같아 가만히 건져서 논에 옮겨주었다. 올챙이는 수도 없이 많다. 이제 막 꼬리가 나와 기막히게 헤엄을 치며 도망다녔다. 땅강아지라도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흙을 헤집고 들어갔고, 소금쟁이는 빗방울 떨어지듯이 통통 튀며 달아났다. 거머리도 기본적으로 서식하는 생물이다. 흡착력이 강한 거머리는 한번 들러붙으면 떼어내기 어려운데, 처음엔 엄청 징그러웠다. 물론 지금도 다른 생물들에 비한다면 썩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은 찾아와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고맙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대부분의 논밭이 강한 농약이나 제초제를 뿌리고 농사를 짓는 통에 오래전 쉽게 봤던 생물체들이 거의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와 준 여러 생명체들이 반가워서 올 한해도 우리 논에서 잘 살다 가길 바란다. 그저 있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가끔은 이웃집에서 본인들이 뿌리다 만 제초제를 우리 밭 근처에 버리고 갈 때가 있다. 순식간에 누렇게 뜨는 풀들을 보면 왠지 마음이 아프다. 한번은 우리 논 가까이에 있는 이웃집 밭에 산딸기가 탐스럽게 열린 적이 있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딸기에 반해 두어 개 따서 먹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두통과 발열과 구토가 일어났다. 어지러움이 심하여 한참 고생을 하였다. 알고 보니 산딸기 아래에 며칠 전에 뿌려놓은 제초제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곳에 산딸기, 자두, 감, 대추가 탐스럽게 열리지만 그 이후부터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열매에 손을 댄 대가가 너무나 컸다.
이렇듯 요즘 우리는 살아있는 생물, 다양한 생물들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인위적인 환경에 의한 생물을 봐도 사람의 마음이 반갑거늘, 하물며 깨끗한 환경의 자연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생명체, 어릴 적 냇가나 강이나 연못에서 만났던 생명체를 만나는 것은 얼마나 더 반갑지 않으랴. 다양한 생명이 노니는 논이 있기에 그곳은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지난 겨울과 봄 사이, 이웃집 아이가 아빠와 함께 논에 미꾸라지와 개구리 알을 잡으며 놀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잡은 미꾸라지와 개구리 알을 다시 논에 놓아주었다고 한다. 비록 작은 생명체이지만 그 생명체를 대하는 아이의 마음에도 생명에 대한 경외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친환경 농사가 어려운 것은 알지만 우리가 조금만 노력한다면 사라지고 잃어버린 생명체를 어느 정도 회복하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갖는다. 그래서 난 올해도 꿋꿋이 약없이 무식(?)하게 힘써 농사를 시작한다. 지난번에 씌우다 만 두둑은 비오기 전날 초인의 힘을 빌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덮었다. 몸은 녹초가 되고 정신은 저만큼 나가 있었지만 그래도 하루 만에 끝장을 봤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그 맛에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닌가. 하하! <끝>
황은경/농촌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