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부활
부활은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신앙고백이지만, 전유물의 호주머니를 떠난 지 오래다. 1990년대 초 극장마다 영화간판을 그리던 시절이었다. ‘종횡사해’(1991년)란 영화의 카피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피보다 더 붉은 포도주로 우리의 부활을 선언 한다”라는 선전 문구를 버젓이 붙인 오락물의 광고판을 보면서 문득 세속화된 부활언어를 고민하던 기억이 난다.
광주항쟁을 드믈게 영화로 만들던 시대에 붙인 제목은 ‘부활의 노래’(1991년)였다.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1980.6.2. 전남매일신문)를 외치던 김준태의 시구는 이젠 선언적 부활을 노래하고 있었다. 영화는 검열로 곳곳이 삭제되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5·18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였다. 어쨋든 부활이란 주제는 교회만이 독점하는 설교는 아닌 셈이다.
그런저런 메시지는 얼마든지 있다. 이솝 우화(寓話)에 나오는 ‘요술쟁이와 생쥐’가 그 중 하나이다. 생쥐 한 마리가 요술쟁이 집에 살았다. 그 집에는 고양이도 살았기 때문에 생쥐가 너무 무서워하였다. 불쌍히 여긴 요술쟁이는 생쥐를 고양이 모양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를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의 모양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호랑이가 무섭다는 것이다. 실망한 요술쟁이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겉모양만 바뀌었지 속은 계속 생쥐의 마음이니 가망이 없구나. 다시 생쥐가 되어라.”
부활절기에 종종 듣는 예화이다. 믿음은 단지 겉모습의 변화에 그치지 않으며, 속사람의 변화를 뜻한다는 결론이다. 사실 겉모양이야 어찌 보이든, 외형적인 조건이 어떻게 변화하든, 그것은 문제의 해결점이 되지 못한다는 비유가 와 닿는다. 마음이 거듭나는 진정한 부활신앙은 단지 입술에 머물지 않으며 삶의 변화와 직결된다는 해석에서 우화의 힘이 느껴진다.
1980년대에 <꽃들에게 희망을>(트리아나 포올리스)이란 장기 베스트셀러가 있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쉘 실버스타인)와 함께 분도출판사의 고전적 출판물로 절판된 지 오래다. 그림책치고는 글씨의 비중이 커서 성인을 위한 그림 이야기로도 사랑을 받았다.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알이 애벌레가 되고, 번데기가 되고, 결국 성체가 된 나비이다. 나비는 꽃들을 찾아다니며 희망을 준다. 이 책은 어렵고 위험한 시절을 살던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절망하지 말라. 네 안에 있는 잠재력, 그 희망의 씨앗을 발아하고, 싹을 틔워라”는 시대정신을 담은 메시지라는 평가를 들었다. 고통의 시대일수록 부활의 언어는 오히려 교회 밖에서 얼마든지 배회하였다.
사실 나비 비유의 전형은 키에르케고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인간을 개미 유형, 꿀벌 유형, 나비 유형 등 세 가지로 나누어 풍자하면서, 가장 진실한 삶을 ‘나비형 인간’으로 비유하였다. 나비는 어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꽃에서 꽃으로 전전하면서, 화분을 모아 꿀로 변화시키며, 궁극적으로 생명을 가져온다.
시절나절 비유와 풍자를 통해 부활 메시지를 배우려는 까닭은 그만큼 부활신앙의 어려움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근 제자들이 세상으로 나갈 빗장을 풀기 위해 번데기로부터 나비가 되는 진통이 필요했듯이, 낡은 것을 박차고 새 것을 향해 나가기 위해 그만한 부활실천이 요구되었다.
아마 나비효과란 말은 그런 파급력의 영향을 뜻할 것이다. 나비의 작은 날개 짓일망정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선한영향력도 말하자면 복음에서 익혀온 선한 의지와 착한 행실로 부지런히 날개 짓하여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부활절기는 부활절 단 하루 동안만 그 신비를 설교하고 말 일은 아니다. 어쩌면 영화와 노래, 그림책과 이야기를 통해 온고지신 배워오듯 날마다 믿음과 행함을 촉구할 일이다. 부활은 죽음 후가 아닌, 죽음 이전의 삶에서부터 시작할 일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 새 창조로서 부활은 살아 있는 동안 일어나는 법이 아닌가?
송병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