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꼰대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만약 이 말을 생각하거나 말한 적이 있다면 당신은 꼰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꼰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1.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 2.학생들의 은어로, ‘선생님’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지만 이 사전적 정의는 우리가 실생활에서 겪는 꼰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주로 나이를 무기로 천박한 참견질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경멸을 가득 담아 ‘꼰대’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한다. 이 꼰대의 정체는 대체 뭘까? 아마도 꼰대란 남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전제로부터 나오는 모든 태도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내가 겪어봐서 이 사안에 있어서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는 생각, 그래서 겪어보지 못 해 잘 모르는 네 사정에 내가 참견을 해도 이건 오히려 네가 고마워해야 한다는 생각, 내가 겪어봤으니 난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는 생각, 이 모든 생각의 총합이 바로 꼰대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경멸해마지 않는 꼰대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셈이다.
특히나 고통과 아픔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꼰대짓을 일삼는 경향이 많다. 내가 겪은 종류와 비슷한 고통이나 아픔을 누군가 겪는 것을 보면 우리는 상대의 처지나 기분 따위 아랑곳없이 즉각적으로 개입하기 일쑤인 것이다. 물론 이 개입은 위로라는 선의에 바탕을 둔 행동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위로와 충고의 이름으로 가하는 참견이 과연 참 위로를 가져다줄까? 많은 경우 이 참견은 실제로 위로를 가져다주는 성공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이고, 실패의 경우 그 대가는 쓰고도 참혹하다는 점이다. 같은 종류의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과연 나는 그 사람의 아픔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고통으로 인한 아픔의 정도는 개인마다 다르고 사정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정도쯤이야,라고 생각하는 고통에 대해 차라리 삶을 끝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나로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는 사람도 있다.
불멸의 첫 문장을 지닌 유명 소설들에 역시 자신의 이름을 올린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어쩌면 이 사실에 대한 가장 또렷한 적시일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비록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모든 불행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각색이다. 그러니 타인의 고통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나의 고통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설사 아주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아픔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 이것이야말로 꼰대스러움의 시작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꼰대스러움은 결코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영적인 영역에서의 꼰대스러움은 더욱 참담하다. 예를 들어 목회자들은 다음과 같은 착각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모든 분야에 정통하다.” 때로 착각은 강박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나는 모든 분야에 정통해야 한다.” 이 착각이나 강박은 모든 사람들을 위로해야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바른 충고를 해야 한다는 선의에서 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선의는 그 자체로 충분한 적이 거의 없다. 목회자가 모든 고통의 위로자가 되려고 한다면, 그는 실패를 지나 교만에 이르고, 결국 영적 꼰대가 되고 말 뿐이다.
나는 나의 고통만을 알 수 있을 뿐이고, 타인의 고통은 단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위로란 함께 있어줌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이해해줌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위로자이신 하나님은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지 않은가. 이 사실들을 깊이 깨닫고 의식한다면 우리는 내 안의 꼰대성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선의를 가장한 내 안의 꼰대성은 알아채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 (마 7:4)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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