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응하는 돕는 자’로서의 남성과 여성
“<에베소서>를 보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는 반면,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듯 사랑하라고 합니다. 왜 아내만 ‘복종’을 해야 하나요? 남편이나 아내나 동등한 존재인데 이 구절은 둘의 관계를 평등하지 않게 정의하는 건가요? <창세기>에서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왜 하나님은 여성을 남성의 신체 일부로 만드신 거죠?”
교회나 선교단체 특강을 가면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다. 첫 글을 읽은 독자라면 이미 ‘맥락화’, 경줄과 위줄의 관계를 근거로 이 구절이 갖는 문화적 한계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사실 <에베소서>는 바울의 후기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정도의 성서 편집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문체나 언어적 특성 등을 통해 이것이 2세기경에 쓰인 것임을 알 것이다. 바울의 순교시기를 고려할 때 그의 직접적인 서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고대에는 스승을 따르던 제자들이 스승의 이름으로 글을 쓰거나 책을 편집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걸 인정한다면 위의 질문은 대답이 간단하다.
종교사회학적인 시각에서 신학적 문제들을 짚어갔던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에 따르면, 본디 종교는 그 주창자가 주장한 신앙 1세대 때에는 기존 제도를 혁파하고 혁명적인 관계성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점차 세대가 가면서 생생한 신앙 경험이 기록되고 전달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제의나 경전 편찬 작업, 성직자를 비롯한 위계가 확립되는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과정을 거친다. 성전 제의와 율법 중심의 유대교도 제도화의 끝에서는 그랬고, 중세 말기의 가톨릭도 그랬다. 어쩌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다는 현금의 개신교도 그럴지 모른다. 제도화의 과정에서는 언제나 처음의 혁명적인 관계성이 사라진다. <에베소서>가 쓰였던 2세기는 예수나 바울의 시절보다 제도화가 꽤 진행된 시점이었고, 당시 가부장제도의 전제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에이, 말도 안돼요. 십분 양보하여 그것이 후기 저작이라고 해도, 바울이 쓴 게 분명하다는 <고린도서>도 여전히 여성차별적인 언사가 많이 담겨 있잖아요.”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 변론은 “여자에게 잠잠하라”던 바울의 주장은 어느 특정한 신앙 공동체의 제한적 상황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맞닥뜨렸을 때 문화사회학과 신학을 접목하여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하는 대답은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한 주석이 아니다. 바울 서신에서 몇 개의 여성차별적 구절을 찾아내는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당시는 ‘강한 가부장제’(strong patriarchy)가 작동하던 시절이었다. 집안의 가장은 자신의 소유를 향해 전권을 가졌고, 아내나 자녀들을 포함하여 식솔들의 생살여탈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반면 여성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갈 법적, 실질적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던 시절이다. 이런 시절에 오늘날과 같은 성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실천 불가능했을 거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는 남녀노소 빈부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던 바울 신앙의 기조에서 볼 때, 그의 교회론적 모델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신앙의 경줄’ 역할을 하지 싶다. 사도 바울이 교회의 관계성을 묘사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표현이 “서로가 함께(kai allelon)”이다. 서로가 함께 인내하고 사랑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건설해나가라고 했다. 그게 교회라고.
사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두 사람은 이미 교회다.(마태 18:20).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셨으니 태초의 남자와 여자 역시 교회 관계로 지음 받은 셈이다. “옆구리에서 빼냈다”는 표현은 남성 신체에 종속된다고 해석되기 보다는, 동등하게 마주보는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고백의 문학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하나님의 계시에 가깝다. 하나님의 뜻은 잃은 양 한 마리도 배제하지 않는 보편‧평등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지 않나.
“에제르 케네그도(ezer kenegdo)”, ‘돕는 배필’로 번역된 이 원어는 ‘그의 마주봄 같은 도움’이라는 의미다. 강한 가부장제도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게 마주보기 보다는 위아래로 보았던 위계적 관계였다. 남편은 ‘주’였다. 허나 이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질서에 위배된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상응하며 마주보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돕는 주체’로 서게 하셨다는 고백이 강한 가부장제가 ‘문화적 당연’이던 시절에 고백되었다는 것이야말로 계시가 아니면 무엇이랴.
이는 여성만이 일방적으로 남성을 돕는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창조성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 선택이 가능한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 자칫 자기교만이나 자기포기의 삶을 선택을 할 수 있으니.
하여 이를 서로 견제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건설하는 짝 공동체로 부름 받은 것이 남성과 여성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주장이 듣기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성경의 말씀에 반(反)하는 자이다.
백소영(이화여대 기독교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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