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엽서 이야기
요즘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이 참 서툴다. 물론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손 글씨 장애 현상은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이젠 겨우 몇 줄 쓰는 메모조차 개발새발이다. 컴퓨터 자판에 익숙해지면서, 상상력이 손가락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스마트 폰이 등장하면서 다섯 손가락으로 글을 쓰던 습관조차 엄지 하나만으로도 가능해졌다.
컴퓨터와 스마트 폰은 문서 작성에 대단한 효율을 가져왔지만, 인간은 여러 가지 장애현상에 직면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억력 퇴화를 호소한다. 핸드폰의 저장 기능과 검색 능력은 사용자에게 스스로 기억하는 능력, 독서하는 능력을 빼앗아 갔다. 머지않아 ‘핸드폰 사용과 기능성 치매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논문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른바 문명병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감성과 감성대화가 대단히 삭막해졌다. 예전에 라디오 프로그램 DJ에게 음악 신청을 하려면 방송국에 엽서를 보냈다. 진행자의 채택을 받으려고 예쁜 엽서를 만드는 일이나, 꼼꼼하게 작성하는 메시지, 며칠 씩 걸리는 시간의 낭비에도 그런 불편들조차 추억이었다.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이 점점 사라지면서, 잃어버린 것은 필기하는 능력만이 아니다. 소통의 감수성이 정성스런 손에서 나옴을 깨닫게 된 것은 오래지 않다.
요즘 우체통을 채우는 것은 더 이상 봉함편지가 아니다. 깨알 같은 그림엽서는 옛말이 되었다. 통신비 고지서와 카드청구서, 광고용 우편물이 대부분인 우편함은 더 이상 기대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제 와서 동시적으로 소식을 공유하는 카톡이나 문자전달의 효율성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손 글씨 쓰기나 엽서를 주고받는 일까지 모두 분리수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가장 오래도록 문명사회가 습득해온 필기수단과 소통방식을 불과 몇 년 새 폐기처분한 것이 과연 적절한 선택인지, 합당한 진보인지 묻고 싶었다. 이제 편지쓰기는 신촌 현대백화점 지하통로의 ‘느린 우체통’처럼 특별한 이벤트로만 남았다. 여기에 편지를 넣으면 1년 후에 배달된다고 하니, 아마 미래의 자신에게 오늘의 내가 보내는 셈이다. 그만큼 편지 쓰는 일은 아주 고전적인 일로 치부되고 만다.
내가 지닌 보물 가운데 몇 권의 엽서모음집은 아주 특별하다. 그 중에서 1992년 봄에 난생처음 해외여행을 나서면서 외국에서 집으로 날려 보낸 그림엽서들은 언제 다시 보아도 반가운 얼굴 같다. 당시 오래 동안 집과 교회를 비우면서 미안한 마음에 보고용 기록을 남기려고 노력했던 마음이 새롭다. 그래서 비행기 타는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아내에게 엽서를 보냈다.
중요한 원칙은 매일 엽서를 쓰되, 내가 머무는 그 나라 엽서와 우표를 이용해 보내는 것이었다. 여행에서 돌아 온 후에도 나보다 늦게 도착하는 엽서를 거의 일주일 동안 잇달아 받았던 기억이 아련하다. 무엇보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이나, 미국 등 그 나라 사람들의 엽서 문화가 큰 도움이 되었다. 어디를 가나 엽서를 구할 수 있었고, 심지어 비행기에서 쓴 엽서를 주소지로 배달하는 서비스도 있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52통의 엽서는 내게 엊그제 같이 생생한 감성을 되돌려 준다. 무엇보다 엽서쓰기를 통해 혼자 여행하는 미안함을 덜 수 있었고, 아내에게 “Ich liebe Dich”라고 용기 있게 적을 수도 있었다. 아마 나만의 기록문화를 꼽으라면 으뜸의 지위를 차지할 만 하다. 당시 공동수신자인 아이에게도 좋은 유산이 될 것이다.
손으로 쓰는 엽서는 단순한 손 글씨의 정성에서 그치지 않는다. 손 엽서는 참 친밀하고 정겹다. 말로 다 할 수 없고, 문자로 더 채울 수 없는, 화해와 위로의 내용을 담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받는 사람만이 아니라 엽서를 고르고, 손으로 쓰고,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이는 과정을 통해 보내는 내게도 이미 큰 기쁨이 된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고후 3:2)라고 말한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내신 희망의 메시지요, 풍성한 사랑의 감정을 담은 하늘의 연애편지와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도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편지로 전달되고, 또 그런 사랑의 전달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아보니 엽서쓰기는 내 하루의 영성과 관계를 부요하게 만들어 주었더라. 그래서 잊고 산 옛 취미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런 귀찮은 의무일망정 일용할 수고처럼 부담을 지고자 한다. 손가락 ‘편지쓰기’가 아닌, 가슴으로 쓰는 ‘편지쓰기’가 많은 이들의 호응을 불러내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예쁜 엽서를 제작해 나눠주면서, 재삼 ‘손 엽서 쓰기’를 제안하는 이유이다.
더 이상 손가락의 장애가 마음의 장애, 관계의 장애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 손가락의 진심이 쌓이고 싸여 사람 사이 진심의 문화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내 손으로 엽서를 쓰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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