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섭지 않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신앙의 고민이 절정에 달해 있었을 때,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거리 모리비안 교도들의 기도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들으며 큰 영적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감리교도들은 이 깨달음의 순간을 웨슬리의 ‘회심’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 회심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를 처음 믿게 되었을 때의 회심과는 다른 의미로 신앙에 있어 새로운 영적 차원으로의 진입이라 불러야 맞을 것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부를 만큼 이 사건은 존 웨슬리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존 웨슬리가 이 순간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는 말은 이후 그의 회심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이 우리말로 번역된 ‘뜨거워졌다’는 말, 원문과 비교해보면 언제나 왠지 너무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잘 알다시피 ‘warm’은 따뜻하거나 훈훈한 쪽이지 ‘hot’처럼 뜨거워진다고 번역하기에는 좀 과하다. 아마도 통용되고 있는 현재의 번역은 신앙에 있어 뜨거움을 강조한 한국적 부흥 신앙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어쩌면 가장 적합한 우리말 표현은 다음과 같은 말이 아닐까 늘 생각하곤 했다. “나는 가슴이 이상하게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유명한 말 이외에 언젠가 웨슬리의 말이라고 전해들은 꽤 재미난 말이 하나 더 있었다. 이것은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같은 학위 과정에 있었던 여러 교단에서 온 전도사님, 목사님들과의 대화에서 들은 말이다. 한 성결교 목사님이 자기도 전해들은 말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웨슬리의 일화를 전해주었다. 한 신도가 존 웨슬리를 찾아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 물었단다. “오직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오시기도 전에 태어났다 죽어서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이 교리 질문은 꽤 유명한 질문이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답들과 그 모든 해답의 모호함과 불충분함을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모른다. “그때 웨슬리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아니 존 웨슬리가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한 말이 있었던가? 우리 모두는 그 성결교 목사님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입을 연 그 성결교 목사님의 대답. “웨슬리가 이랬데요. 하나님께서 섭섭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폭소를 터뜨렸다. ‘섭섭지 않게 해 주신다니, 그거 꽤나 신박한 표현인 걸?’ 정말 이런 말이 있는지, 있다면 원문은 무엇인지 한동안 열심히 찾아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런 말은 찾을 수 없었다. 여전히 지금도 가끔씩 찾아보긴 하지만 아무래도 위의 말은 카더라 통신이나 믿거나 말거나 같은 유머였던 것 같다. 하지만 가슴이 뭉클해진다는 말만큼이나 딱 제 옷처럼 우리 정서와 마음을 두드리는 표현인 ‘섭섭지 않게’, 우스갯소리 같은 말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섭섭지 않게 해 주시리라는 말은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 정체도 불명하고 출처도 불명한 인용을, 물론 그 사실을 분명히 상기는 시키면서 여러 자리에서 소개하곤 했다. 뭐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문제들에도 이 ‘섭섭지 않게’라는 말은 논리 너머의 많은 것을 담아 가슴에 머물게 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해할 수 없거나 풀기 어려운 생각과 사태와 상항을 만날 때에도 이 말은 늘 상상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곤 한다. 해결의 요청보다는 신뢰의 고백 같은 이 말, 그러니 어려운 순간마다 가끔씩, 어쩌면 바로 오늘, 서로에게, 또 자신에게, 이 마법과도 같은 말을 건네 보는 건 어떨까? “하나님께서 섭섭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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