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쓴 말이다. ‘신념’이라고 번역된 독일어 Überzeugungen은 ‘확신’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니 니체의 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도 있다. “확신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도대체 니체는 왜 확신이나 신념이 진리의 적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것은 진리의 성격과 관련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진리와 관련하여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곰곰이 씹어보면 당시나 지금이나 상당히 충격적인 말씀이다. 모름지기 진리란 언제나 ‘불변의’라는 수식어가 의당 그 앞에 따라붙는 것처럼 결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늘 한결같이 고정된 그 무엇이라고 생각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인간이시면서 인간인 자신을 진리라고 칭하고 계신 것이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인간, 그러한 자신을 예수께서는 진리라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진리에 대하여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기존의 생각에 던지는 결코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진리란 고정되어 고착된 무엇이 아니라 마치 바람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 무엇인 셈이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바람과도 같은, 아니 바람 그 자체인 영처럼(요 3:8), 진리 또한 자유롭고 역동적이며 변화무쌍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신념이나 확신은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국어사전은 신념(信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굳게 믿는 마음.” 확신(確信) 역시 비슷하다. “굳게 믿음. 또는 그런 마음.” 보다 선명하게도 확신이라는 한자어 속에 들어 있는 確은 다름 아닌 ‘굳을 확’이다. 그러니까 신념이나 확신은 굳은 마음, 굳어진 마음인 셈이다. 물론 굳은 마음이 나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경우, 특히 유혹이나 시험과 관련되어서 이 굳은 마음은 보석 같은 빛을 발하는 귀한 자산이 된다. 그러나 유혹이나 시험이 아니라 진리와 관계할 때 이 굳은 마음은 가장 나쁜 악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AD 39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과 함께 핍박당하던 기독교는 마침내 핍박하는 기독교로 바뀌고 말았다. 영화 <아고라>는 힘을 사용하여 교리에 어긋난 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기독교 타락의 이 시점을 그리스의 마지막 수학자요 철학자였던 히파티아라는 여인의 일대기와 엮어 보여준 영화다. 영화 속에서 히파티아는 기독교 주교가 되어 돌아온 자신의 애제자가 자신에게 개종을 강요하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시네시오스, 넌 네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아. 혹은 그럴 수 없거나. 하지만 난 그래야만 해.” 진리의 끝자락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던 이 철학자는 결국 확신에 가득 찬 기독교 광신도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고 만다.
확신과 신념으로 가득 차 정죄에 여념 없는 지금 한국의 기독교계를 바라보면서 나는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확신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파스칼의 다음 말이 무섭도록 다가오는 요즈음이다.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이 있을 때 더욱더 철저하게 기쁨에 넘쳐 악을 행한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 (겔 36:26)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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