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역사 이야기
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진부령에는 다시 추위가 찾아와서 간절기 잠바를 꺼내 입었습니다. 남편이 예초기를 돌려서 집 주변의 무성한 풀들이 잘려나갔습니다. 햇볕을 쬐기 위해 나온 어린 뱀들을 아직은 마주치지 못했지만 곧 그 모습을 드러낼 터라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하는 집 뒤쪽은 예초작업을 잘 해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뭄을 해소할 만큼은 아니지만 지난 주 내린 비가 농사를 짓는 마을 주민들에게는 작은 해갈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기독교 역사학을 공부하신 목사님께서 먼 진부령까지 오셔서 우리나라의 선교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어르신들이 어려워하실까 걱정이 좀 되었지만 다들 집중해서 들으셨습니다. 인근 교회에서도 함께 참여하여 예배당도 꽉 찼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고성에 복음을 전한 것이 원리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 남감리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땅의 대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이 변두리 원산이었다는 것을 통해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도 깨달았습니다.
저도 기억에 남는 내용을 조금 소개해 보겠습니다. 요즘은 저의 기억력을 믿을 수가 없어서 기억하고 싶은 것은 기록을 합니다. 주보에 빼곡히 기록된 내용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인 1884년에 이미 자생적인 교회(소래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조선의 봇짐장수였던 서상륜이 만주에서 병을 앓아 사경을 헤맬 때 중국 선교사로 있던 로스-매킨타이어가 극진히 돌보아 살렸습니다. 이에 서상륜이 “저들이 자신들의 믿음 때문에 나를 살렸다면 나도 그 신을 믿겠다.”하고 만주에서 세례를 받고 성경을 조선말로 번역하여 쪽 복음으로 조선에 가지고 와 백홍준, 이응찬, 김준기와 함께 전국 곳곳에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우리말 성경이 조선의 영혼들을 깨우고 소래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위로 후일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우리가 씨를 뿌리러 와서 보니 이미 거둘 일만 남았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업고 피신을 시킨 이수정이 고종의 상으로 통신사와 함께 일본에 가서 농업기술을 배우던 중 그 스승이었던 쓰다의 집에서 팔복이 적힌 액자를 보고 그 경전이 무엇인가 배우기 시작하여 성경을 읽고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성경을 조선어로 번역하기 시작했고 한국 선교사로 파송 될 언더우드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로 들어올 때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말 성경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조선어를 배운 후 번역된 것이 아니라 이미 조선인에 의해 번역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1866년 토머스 선교사가 복음을 들고 들어올 당시의 배는 군함과 무역선의 구분이 없었다고 합니다. 군함이자 무역선인 배를 타고 조선에 온 토머스 선교사는 제너럴셔먼호가 민간인을 인질로 삼고 교역을 요구하며 대포를 쏜 연유로 배에서 끌어내려져 대동강에서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토머스 선교사는 그 자리에 있던 간수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쪽 복음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던 간수가 복음서를 벽에 벽지로 바르게 되고 매일 벽에 쓰인 복음을 읽다가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다른 여타의 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와 달리 오직 우리나라만이 제국주의 침략과 기독교 신앙이 따로 분리되어 전파되었다는 점입니다. 보통은 제국주의 침략이 일어나고 신앙이 전파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 기독교 신앙의 전파 경로가 달랐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예수를 믿는 일이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일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일로 일반인들에게도 인식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독립투사를 길러내고 스스로 투사가 되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오랜만에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우리나라 선교의 역사에 대해서 강의를 들으니 귀가 뻥 뚫리고 마음이 시원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중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작은 아파트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이웃의 항의로 예배를 중단해야 했던 일도 생각이 났습니다. 당시 30대 중반이셨던 목사님은 어린 청년들 앞에서 눈물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이후 공장 건물의 3층으로 (야간 시간과 주일에 마음껏 찬양할 수 있는)예배 장소를 옮길 때의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청년들은 매일 수업이 끝난 후 함께 모여 늦은 시간까지 짐을 들어 옮기고 청소를 하고 강대상을 만들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오래 전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울며 씨를 뿌린 이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습니다. 조선말로 성경을 번역하여 누구나 성경을 읽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우리 선조들의 열정과 부지런함에 또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저도 게으르지 말고 선한 일에 힘을 내어 오늘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홍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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