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요란함 속에 숨은 존재적 표현
감사의 달을 보내면서 부모님과 은사님 등 고마운 분들을 찾았습니다. 일 년 중 하루를 챙긴다는 것이 어쩌면 나머지 다른 날들은 무심하게 보낸다는 의미일 수도 있는데도 아이처럼 반갑게 맞아 주시고 왠지 모를 뿌듯한 마음도 덤으로 얹어 주시니 그마저도 나를 위한 일인가 싶어 죄송스러워 지기도 합니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오면 노래가 먼저 생각납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와 같은 노래들이 매년 이맘때면 우리네 마음속을 흐릅니다.
신병교육을 받을 때였습니다. 가장 힘든 유격 훈련을 마치고 모두가 지쳤을 때, 교관이 ‘어머니의 마음’을 다함께 부르게 했습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처음에는 수줍은지 머뭇거리기도 하고 가사를 몰라 0.5초의 시간차를 가지고 따라 부르는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어느새 병사들은 땀과 흙으로 범벅된 전투복 소매로 눈물을 훔치기 시작합니다.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시네”까지는 모두가 은혜롭게 잘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후렴에 이르러서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목청을 높여 “아아 고마워라”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스승’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오게 되자 모두가 상황을 알아차리고 함께 웃으며 유야무야 노래를 마무리 했습니다.
어쩌면 어버이는 처음 스승이요 스승은 인생의 어버이라고 할 수 도 있기에, 이 두 곡의 절묘한 조화가 이 땅의 아들들의 비극과 희극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이루어 진 것은 시대성과 예술성이 있는 한편의 고품격 퍼포먼스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문득 이 두 노래는 왜 그렇게 닮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바로 우리의 정서 때문이지요. 우리 스스로 깨닫기는 힘들지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자리에서조차 우리의 정서에는 슬픔이 서려 있습니다. 지난 주, 작가 알랭 드 보통이 한 TV 프로그램에서 “한국인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는 "한국인들은 멋진 멜랑콜리를 갖고 있다. 그들은 슬퍼할 줄 안다" 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신론자인 그의 지나친 자기 확신은 종종 나를 불편하게 하지만 그 탁월한 인식은 늘 저를 놀라게 합니다.
제가 노래에 관해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마음이 동하여 말이 되고, 말이 다듬어져 시가 되고, 시가 악센트를 가져 꿈틀대기 시작하다가 선율의 날개를 달고 노래가 됩니다. 감각에 치중한 오늘날의 노래들을 바라보며 가사의 중요함을 역설하는 것이지요. 노래는 음악에 가사를 갖다 붙인 것이 아니라 ‘시적 표현의 완성’이라고 말입니다.
사뭇 멋진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오늘, 부모님과 스승을 향한 감사의 노래를 생각하는 지금은 저의 모든 딱딱한 외피들이 너무나 유치하고 부끄럽게만 느껴져서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감사의 노래를 이렇게 추억하고 흥얼거리다보니 부모님을 통해 어린 나를 다시 만나고 스승을 통해 모든 게 어설펐던 나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나는 그냥 그대로인 줄만 알았는데, 삶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딱딱해져 버렸던 자신을, 자신을 포장하고 감추는데 급급했던 자신을 발견합니다.
노래에는 다른 힘이 있습니다. ‘노래함’이라는 전적이고 요란한 행위 뒤에 나를 숨기고 차마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던 한 마디, 구구절절한 가사가 아니라 단 한마디 말을 전할 수 있는 힘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 ‘계속 죄송하렵니다’...
어릴 적 부모님 앞에서 씩씩하고 깜찍하게 노래하기를 그만두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외피는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세상 속에 던져져 이리 저리 치이며 살아왔습니다. 어버이께 노래를 불러드린다는 것은 그 때의 나, 뭣 모르고 사랑을 주고받았던 나로 돌아가서 구구절절한 가사나 멋진 표현아 아니라 존재적 표현 한마디를 던져 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삶의 외피와 생채기 속에 숨 쉬고 있는 우리의 여리디 여린 속살을 다시금 발견하게 되고 보듬습니다. 부모님과 스승은 오늘도 그렇게 우리를 가르치시고 품어주고 계십니다.
사랑합니다.
조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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