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나라의 국민
“두 왕국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왕국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이 말은 이후 ‘두 왕국론’이라 불리는 신학 주제로 정착되었으며 신학의 역사에서 복잡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여기서 그 복잡한 논쟁을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말과 함께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이라는 이중성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실존을 잠시 생각해보고자 할 뿐이다.
며칠 전 세상이 바뀌었다. 부패한 권력이 법의 심판을 받고 국민은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이제 세상은 분명 조금은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될 터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로부터 연유한 여러 문제들은 어김없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며, 그 가운데 어떤 종류의 불의는 여전히 힘을 발휘할 것 역시 분명하다.
루터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동시에 두 왕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왕국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왕국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제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미 살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놓인 우리는 그러므로 늘 양쪽에 반쪽씩을 걸치며 살아가는 인생인 셈이다. 이 이중적인 우리의 실존은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결정해준다.
그 말은 우리가 아무리 선한 정부를 만난다 할지라도 여전히 이곳은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아무리 선한 정부라 할지라도 악이 전무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정부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이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아직’이니 우리는 끊임없이 불의를 찾아내 싸워야 할 것이다. 악한 정부야 물론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악한 정부에 대한 대항은 성경의 표현 그대로 ‘피 흘리기까지’(히 12:4)여야 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로마제국에 세금을 바치는 문제로 예수를 시험했던 사건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율법에 적법한 것이냐는 교활한 질문에 대해 예수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앞에 놓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리라고 말했다. 예수는 악의적인 질문에 대해 주제를 극단화시킴으로써 질문 자체의 근거를 박살내는 전략을 자주 사용하셨다. 어쩌면 이것도 그런 종류의 대답이었을지도 모른다. “너희는 율법 운운하면서 로마제국에 세금을 바치는 게 율법에 허락되었냐고 묻느냐?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중요시한다면 우상이 새겨진 화폐 자체를 아예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 이 위선자들아!” 하나님을 순전하게 섬겨야 하는 것은 맞으나 또한 동시에 불가피하게 하나님 나라가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어쩌면 예수는 당신의 대답으로 이런 말도 함께 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두 나라와 관련해 베드로전서의 기자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나그네’, 즉 ‘이방인’으로 선언한다. 정치적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 어떤 정부에게든 우리는 늘 낯설게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고, 그 어떤 정부든 우리는 늘 그 정부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이고, 그 어떤 정부 아래서든 우리는 언제나 타향살이의 심정과 태도로 살아갈 수밖에 사람들이라는 것. 본향을 그리워하는 영원한 타향살이 신세, 우리는 그렇게 두 나라의 국민인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적 정욕을 멀리하십시오.” (벧전 2:11])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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