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모른다.
“어떤 부자가 손님을 대접하는데 자기 양 잡는 게 아까워 가난한 이웃이 가족 같이 키우는 하나밖에 없는 양 새끼를 빼앗아 대접했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듣고 다윗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 파렴치한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 당장 그를 처단하리라!” 그러자 선지자는 왕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오.”(삼하 12:1-15)
다윗은 선지자가 들려준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인줄 몰랐다. 왜일까? 왜 그는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죄악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것일까? 아마도 다윗은 줄곧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최소한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선지자의 말에 대한 다윗의 첫 반응은 그때까지만 해도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식조차 하지 못 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왕은 어쩌면 순수한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여인을 지키지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자신은 순수하고 의리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모든 것을 합리화해왔던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이 저지르는 나쁜 일을 알아채지 못한다. 예는 넘치고 넘친다. 스스로를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자녀에게 끼치는 상처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며, 스스로를 좋은 사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하며, 스스로를 좋은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따르는 자들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좋은 목사라고 생각하거나 좋은 신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의 대한 확신에 눈이 가려져 자신의 결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남의 눈의 티는 또렷이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이유에는 자신의 눈에는 티가 들었을 리 없다는 확신도 분명 함께 있을 것이다.
“나는 혐오하지 않는다.” “나는 차별하지 않는다.” 특히나 요즘 흔하게 듣는 말이다. 이런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일단 환영할 만한 일이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차별에 대한 인식은 점점 더 고양되고, 시민들은 보이지 않거나 의식하지 못했던 차별을 자각하게 되며, 따라서 차별과 관련된 말들은 자연스럽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분장을 통해 흑인을 비하했던 개그맨을 외국인 출신의 방송인이 비난하자 동료 개그맨이 오히려 역비난을 하다가 곤혹을 치른 일이 있었다. 그 동료는 예전 인기 개그프로였던 ‘시커먼스’가 대중을 즐겁게 했던 예를 들면서 그것도 인종차별이냐며 공격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때의 그것은 명백한 인종차별이었다. 단지 차별에 대한 의식이 낮았던 그 시대에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 했을 뿐이었다.
장애인차별이나 성차별을 비롯한 모든 차별의 문제에 대해 나는 혐오하지 않는다고, 나는 차별하지 않는다고 쉽게 단언하는 사람들은 그 말에 뒤이어 엉뚱하게도 차별적인 생각을 서슴없이 말하곤 한다. 오히려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람들이 그 말을 더 자주 사용한다. 일단 자신은 혐오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이 행하는 혐오와 차별을 결코 보지 못한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염려 외에는 자신의 죄를 볼 방법이 없다.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나를 모른다.
본회퍼 목사님의 자기성찰의 시 <나는 누구인가>는 그 점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여준다. 시인인 목사는 자신의 이중성을 또렷이 목격하고 깊이 고민한다. 고민의 끝에서 그는 가장 아름답고 통렬한 마지막 자기고백으로 죄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고독한 물음이 나를 조롱한다. 그러나 내가 누구든지 간에, 당신은 나를 아시오니,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나를 모른다.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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