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사랑
한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벚꽃과 목련이 만개해서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보니 절로 마음이 설렙니다. 아이들이 학교 뒷산에서 캐 온 달래를 넣고 된장국을 끓이니 봄 향기가 입 속에 가득합니다. 요즈음 학교에서는 인근 초등학교에서 부화시켜서 보내 온 5마리의 병아리를 키우고 있으며 유정란 2알을 부화기에 넣고 부화시키는 중입니다. 또 날이 따듯해지면 야외 수업을 하기 위해 아이들 4명과 선생님이 함께 피크닉 테이블 만들기 목공작업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치마를 두르고 임펙트 드라이버와 전동샌더의 사용법을 익히고 샌딩과 도색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날마다 봅니다. 좋은 선생님과 학교를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지난 주중에 말씀을 준비하던 남편이 “하나님은 왜 니느웨로 가기 싫어하는 요나를 구지 물고기 뱃속에 넣어서라도 보내셨을까? 다른 사람을 보내셨어도 되는데 말이야”하고 물었습니다. 옆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던 큰아이가 눈빛이 반짝이더니 냉큼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빠, 그건 하나님이 요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게 사랑은 아니잖아요. 요나가 가기 싫다고 해서 안보내면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엄마 아빠도 우리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지 않잖아요. 잘못했으면 혼내고 제대로 하도록 해야죠”하고 대답했습니다.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니 정답이 확실했습니다.
아이들은 요즘 “우리 어린이날 뭐해요? 어디 갔으면 좋겠어요. 엄마 아빠는 왜 어린이날 선물을 안 사줘요? 어린이날은 어린이를 위한 날이니까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해줘요.” 하고 어린이날에 엄마 아빠가 무엇인가를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선물은 주로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사 주시기 때문에 저희가 따로 사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사 달라는 것이 많을 때 저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편입니다. “해 달라는 걸 다 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야. 안 되는 것을 안 된다고 말 해주는 것도 사랑이야.”하고 아이들에게 자주 말을 합니다. 요나에 대한 질문에서 큰 아이는 평소 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고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저는 큰아이의 말을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나서를 읽을 때 저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깨닫거나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묵상했습니다. 하지만 큰아이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보다 먼저 요나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요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고 가르치시기 위해서 물고기와 니느웨가 배경이 되어 준 것입니다. 요나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보내지 않고 어떻게든 요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얼토당토않게 화를 내며 속 좁은 모습을 보이는 요나가 미울 법도 한데 하나님은 박 넝쿨과 개미들을 보내시며 끝까지 그의 성장을 도우셨습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옮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위의 편지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루쉰 감옥에 갇혔을 때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쓴 것입니다. 워낙 유명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줄 압니다. 편지 속 어머니의 단호한 거절이 얼마나 큰 사랑에 기반하고 있는지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편지 어디에도 “사랑한다.”라는 말이 없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는 어머니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니느웨로 가기 싫어하는 요나를 억지로 보내신 것도, 아들에게 죽음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도, 그 기저에 ‘더 큰 사랑’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랑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큰아이 덕에 단순한 진리 한 가지를 다시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것은 분명 ‘더 큰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거절=미움, 승낙=사랑’이라는 공식을 잣대로 가지고 살지 않기로 합니다. 오늘 하루 두 가지 소망을 가져봅니다. 첫째는 거절당하는 것의 두려움과 슬픔을 이겨내기. 둘째는, 누구에게든지 거절의 말을 할 때는 그 안에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하기.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힘차게 시작합니다.
홍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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