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계
세월이 약이란 말이 있다. 세월이 지나면 잊혀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세월이지났는데도 잊혀지지 않는 일 중에 하나가 금시계에 관한 것이다. 어림잡아 40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부산에서 살고 있었는데 서울에 사는 친구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그는 중견 회사의 회장이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비행기표를 보내왔다. 감사한 마음으로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이른 아침에 그는 나를 대중 목욕탕으로 데리고 갔다. 입구 카운터에서 그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맡기기에 나도 내 시계를 맡겼다. 그 때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나의 시계는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의 시계는 금시계라 싯가가 수백만원에 달하지만 내가 차고 있던 시계는 불과 몇 만원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금시계는 맡기고 보통 시계는 맡기지 안하도 된다는 말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지금까지 그 일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내의 시계
언제부터인가 아내는 그의 손목시계를 잃어버렸다고 푸념을 했다. 미시간에 사는 시누이가 방문했을 때 사준 비싼 시계라고 한다. 비싼 시계를 잃어버리고 찾는 아내를 보면서 내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1.50에 산 것이다. 어린아이 장난감 같은 싸구려 시계인데 충분이 시계의 사명을 다 하고 있다. 정장을 하고 나설 때 나는 그 시계를 차고 간다. 운동을 하러 갈 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갈 때도 여전히 내 손목에는 그 시계가 열심히 일을 한다.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사명이라면 내 손목시계는 성실하게 그 사명을 다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
행복한 삶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책을 써서 이름을 냈던 경제학자가 있다. “비싼 것이 좋은 것이다(Priceless is Beautiful.)”라는 책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싼게 비지떡이란 말이 있다. 싼 것은 제대로 역활을 하지 못하여 버려지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싼 것만을 선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러한 취향은 사치로 사람을 치장하게 한다.
친구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한 말이 생각난다. 미국의 대도시에 사는 한인들이 값이 비싼 고급 승용차을 몰고 다니는 것을 보는데 그들이 다운타운에 가면 못된 인간들의 헷꼬지를 당한다면서 Mercedes Benz 500을 꼭 타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다. 평범하게 살아가면 그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자동차는 운송의 수단이다. 비싼 차가 목적지까지 조금 더 편하게 그리고 조금더 안전하게 이동하는 수단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안전하고 편하게 하는 것이 자동차의 존재이유는 아니다. 그런데 편하고 안전하게 사는 것이 곧 행복한 삶은 아니다.
편하고 안전하게 사는 것보다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좋다. 편하고 안전하지만 불행한 삶이 있다. 몸은 편하고 안전한데 마음이 불편하고 늘 긴장 가운데 산다면 그 삶은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다.
즐거운 나의 집
불의를 행하여 모은 돈으로 남보다 더 큰 집에서 사는 것이 행복할까? 집은 비 바람을 막아주며 추위와 더위를 피하게 해 주고 피곤한 몸이 쉴수 있는 침대와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시설과 가족들이 때때로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면 된다. 부부가 사는 집에 침실이 다섯개가 왜 필요한가? 밤마다 방을 바꾸어 가면서 잠들 것인가?
명품 가방
정부를 속이고 사람을 속여서 모은 돈으로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싼 명품 가방을 사서 들고 다니는 것이 행복할 것 같지 않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자신을 속이고 이웃을 속이면서 긴장(tension) 가운데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가? 자신을 속이고 이웃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하나님은 남을 속여서 모은 큰 돈을 들고 당당하게 성전 문턱을 들어서는 것보다 작지만 거짓이 없는 돈을 들고 겸손하게 성전을 찾는 사람을 더 좋아 하신다.
큰 교회의 고민
거대한 건물을 지어놓은 교회들은 현상유지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고 있다. 몇해 전 한적한 작은 동산 위 넓은 터에 새로 지어진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간적이 있다. 찬양으로 시작된 예배는 생동감이 넘쳤다. 목사의 설교도 은혜스러웠다. 그런데 마음에 먹구름이 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예배 도중 담임목사가 나와서 헌금에 대한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매월 지불해야 하는 융자 불입금이 $35,000.00인데 자금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일년 예산이 그정도 밖에 안되는 작은 교회들이 미국 전역에 널려 있다는 사실이 떠 올랐다. 입을 크게 벌리면 채워준다는 말을 너무 믿은 탓에 그 지경에 이른 것인가? 중세시대의 로마 베드로 성전 같은 건물을 지금 지으려고 한다면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 하겠다.
위기를 맞은 교회
교회들이 위기를 맞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퍽 오래 되었다. 교회로 모이던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 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은 온라인 시대를 살고 있다. 온라인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유로움이다. 시간적으로 또는 공간적으로 매이지 않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어느 특정 공간에 사람들을 가두어 놓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그 사명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그 동안 교회의 사명이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 사명을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박스 안에 사람들을 가두어 놓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교회의 위기는 점차 증대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집단화 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인간들로 하여금 잃었던 자신을 다시 찾게 하기 위해 오셨다.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를 사는 인간들의 비인긴화(Dehumanized)된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안타까워 하신 끝에 꺼내신 마지막 카드가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사람 만들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존재였다. 그런 인간이 고귀한 자유를 잃어 버린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들은 상실된 가운데 살면서 시시로 교회를 통하여 작은 힘을 얻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 다름의 현상이 오늘날 교회의 위기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 위기를 당한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한 인간이 되도록 도와주고 힘쓸 때 위기를 벗어 날 수 있다.
신학교에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잃었던 자아를 회복하여 자유한 참 인간이 되게 할지를 연구하고 가르쳐야 한다. 고루한 문자와 해석이나 이즘(ism)에 매여 허송세월을 보낼 때가 아니다.
소원
내 나이 열 다섯일 때 나를 사람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면서 보낸 세월이 어언간 60년이 넘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한시도 지울 수가 없이 살아온 인생길이다. 지금도 교회를 사랑하기에 기도하고 소견을 밝혀 본다. 사람들로 하여금 잃었던 자아를 회복하게 하는 교회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하소서!
김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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