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는다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이 탄핵을 당할 거라는 것을. 대부분의 국민이 탄핵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매스컴을 타고 흘러넘치는 데도 그는 그랬던 같다. 참 딱한 일이다. 모두가 다 아는데 자신은 잘못을 모른다는 것이.
그런데 이런 일이 실은 그만의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걸 현실화하고 사는 사람도 드물다. 객관화 된 죽음이란 건 너무도 잘 아는데 주관화 된 죽음에 대하여는 아예 모르거나 없는 것처럼 산다. 마치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여기 노벨의 이야기가 있다. 노벨은 1833년 스웨덴에서 태어났다. 그는 화학자요 위대한 발명가다. 33살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온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가 발명한 다이너마이트의 위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산업용으로 보다는 사람을 죽이는 군사용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지 30년 후 신문에 노벨을 깜짝 놀라게 한 기사가 났다. ‘다이너마이트 발명가, 노벨 죽다’라는 제하의 기사였다. 노벨은 버젓이 살아 있는데 이런 기사가 난 것이다. 이 기사는 노벨의 형을 노벨로 착각하여 난 기사였다. 노벨은 살아서 자신의 사망기사를 접했다.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노벨한테는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이 있었다. '다이너마이트의 왕 죽다,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죽다'라는 기사의 내용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러라고 만든 건 아니지만 다이너마이트 발명이 사람들에게 죽음과 파괴를 안겨 준 것이다.
노벨이 지금 그대로 죽는다면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로 남을 게 뻔했다. 노벨은 많은 고민 끝에 자신이 다이너마이트 발명을 통해 얻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세계 평화와 번영에 공헌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데 사용하기로.
이리하여 탄생한 게 노벨상이다. 지금은 노벨이 노벨상으로 유명하지 ‘다이너마이트’나 ‘죽음, 파괴’ 등의 글자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비록 노벨이 죽음과 연관된 것을 발명했지만 객체화 된 죽음이 아니라 주관화 된 죽음과 맞닥뜨렸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야곱이 죽는다. 그의 아들 요셉 또한 죽는다. 창세기 50장을 묵상하며 성도들에게 모두 죽는다고 설교했다.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순간 ‘내가 죽는다면’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죽는다면 무엇 하다 간 사람이라고 남을까.
우리는 남의 얘기는 잘한다. 정치인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종교인들이 썩었다고도 말한다. 자기 이야기인데 남의 이야기 하듯 한다. 박 전 대통령이 그러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탄핵은 남의 얘기인 줄 안 것 같다. 그러니 준비 안 될, 안 할 수밖에.
죽음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은 나의 이야기다. 남이 아무리 죽어도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산 자여야 한다. 죽는 자가 산 자다. 예수님은 죽었다. 그래서 살았다. 성도는 죽음 앞에 맞닥뜨려야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된다.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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