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든 몸, 흉년만난 영혼
경기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최소한 먹는 것에 관한 한 큰 궁색함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풍족한 먹거리 때문에 고마운 마음이 들기보다는 외려 귀한 음식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렸다. 그러고 나자 우리가 발견한 것은 욕망으로 비만해진 자기 자신이다. 지구촌 안의 굶주린 이웃을 보고 별다른 책임감을 못 느낀 결과, 우리 사회는 영양초과에서 비롯된 온갖 현대병을 염려하고 산다.
몸에 살이 많이 올랐든, 조금 말랐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들의 육체는 풍년을 만났다. 누구나 예외 없이 지칠 줄 모르는 식욕 때문에 다이어트를 고민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라고 외친다. 자기 몸의 풍년과 비교해 영혼의 흉년을 걱정하는 이가 많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칠년 간 전례 없는 풍년 동안 그 이후 찾아올 칠년 간 대기근을 준비했던 요셉의 지혜를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리차드 포스터의 ‘겨울 영성’에 관한 말씀은 흉년만난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게 한다. 사실 ‘경건의 모양’만 갖춘 화사한 겉옷을 입은 사람들은 때때로 무화과나무의 열매 없는 무성함으로 자신을 감추게 마련이다. 여름의 찬란하고 오만한 짙푸른 잎들과 가을날의 현란한 빛의 영광이 우리 삶의 본질이 아님에도 매번 자신의 영적 허영에 속고 마는 것이다.
겨울 영성은 앙상하고 불완전하게 자신을 드러낸 겨울나무처럼, 나의 결함과 흠 또는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때 나는 비로소 참 경건과 참 사랑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흉년 만난 영혼을 느끼는 사람은 겨울나무의 발가벗은 모습에서도 겸허히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렇듯 한겨울에도 하늘을 향한 자람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차적 관심은 자신의 영혼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 때문에 갇히지 않도록, 무거워지지 않도록, 어두워지지 않도록, 숨이 막히지 않도록 스스로 지키는 일일 것이다. 당연히 말씀의 양식과 기도의 호흡으로 영혼의 생명을 풍부하게 해야 한다. 연록색의 나뭇잎이 제 몸을 넓게 펴 햇빛을 받아들이듯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항상 자신을 열어두어야 한다.
흔히 기계의 스위치를 켠 상태를 뜻하는 ‘ON’은 그 반대인 ‘NO’와 똑같은 두 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어있다. 우리의 영혼이 늘 깨어있어 ON의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깊은 기도와 묵상 속에서, 대화하는 도중에 그리고 일상의 삶 구석구석에서 크고 비밀한 깨달음과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러기에 내 영혼의 창문이 안으로 잠겨 있는지 자주 돌아보는 사람은 지혜롭다.
성경은 사람의 몸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하나님이 거하시는 살아 움직이는 성전을 방치한다면 이보다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지금은 사순절기이다. 거룩한 시간의 마디를 살면서 내 삶 한가운데에서 영혼의 흉년을 느낀다면 그것은 은총이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부요하신 은총을 사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영성만이 아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이란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봄으로써 자신의 밑바닥 드러난 흉년상태를 깨닫게 된다면 그것 역시 은총일 것이다. 겸손히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경건한 욕심을 부리게 되지 않을까 해서다. 차라리 욕심일까?
송병구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