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의 책임
2017년 3월 10일, 이 날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있어 말 그대로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헌정사상 최초로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의 탄핵을 인용하고 대통령을 파면시킨 것이다. 헌재의 결과는 대다수 국민의 법감정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생방송으로 이 역사적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은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선고문 낭독 속에서 ‘그러나’라는 말의 수사학적 위력이 얼마나 엄청날 수 있는가를 새로이 발견하기도 했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선고문이었으나 선고문 내용 중에는 뼈아픈 부분도 함께 들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탄핵의 여러 사유를 언급하면서 재판부가 여러 차례나 직무에 있어서의 무능을 지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탄핵까지는 어렵다고 말한 부분이었다. 직무상의 불성실이나 무능이 대통령을 파멸시킬 수는 없다는 결론, 이것은 결국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무능의 책임은 그를 뽑은 사람들에게 있다.
그렇다. 지도자의 무능은 단지 지도자의 책임만이 아니다. 그것은 지도자의 책임임과 동시에 그의 무능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그를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든 사람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만일 무능을 알면서도 다른 이유와 의도로 그를 지도자로 만들었다면 그 죄과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대통령뿐일까, 교회도 교단도 크고 작은 추문과 몰상식과 함께 이 실패로부터 그리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무능한 지도자의 이야기는 우리의 성경에도 등장한다.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이야기이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처음 왕인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실패한 왕이었다. 그는 깊은 열등감 속에서 번번이 중대한 결정을 그르쳤다. 사안의 중대함에 비추어 결정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한 결정들도 많았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백성 이스라엘과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제발 나의 체면을 세워 주시기 바랍니다. 나와 함께 가셔서 내가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삼상 15:30)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는 최후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심은 고작 자신의 위신이었다.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사실 그의 이런 무능함은 시작부터 드러나 있었다. 백성들이 왕으로 추대하고자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짐짝들 사이에 숨어 있었던 위인이었다. 사울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왕으로 세웠던 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심 때문이었다. 우리도 주변의 강대국처럼 왕을 가져보자는 욕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불안보다는 보이는 힘에 기대려는 욕심. 욕심은 언제나 눈을 멀게 하고, 눈이 먼 백성을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사울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고,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소위 ‘위’로부터 결정되어 하달된 권력의 시대는 이미 오랜 전에 지났고, 이제는 각 사람 하나하나의 선택이 최고의 권력을 결정하는 시대다. 무능에 대한 책임이 뽑는 자의 몫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게 된 지금, 우리는 선택에 신중을 기하는 마음을 새로이 다잡을 필요가 있다. 단지 정치적인 영역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내의 지도자이든, 교단의 지도자이든, 윤리적 기준은 좀 더 높아야 하고 상식의 기준은 좀 더 견고하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교회는 칭찬은 고사하더라도 최소한 비난과 모멸만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부터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죽는 날까지 다시는 사울을 만나지 않았고, 주님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삼상 15:35)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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