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신앙의 유비(analogy) 모음
사랑하는 이의 옴과 주님의 재림
사랑하는 이의 방문을 받아보았습니까? 그의 방문이 꿈만 같은 기쁨이라면, 그렇다면 주님의 다시 오심은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이의 옴이 설렘을 주듯 주님의 다시 오심은 소망을 주지 않습니까?
또한 사랑하는 이의 옴이 그날까지 하루하루에 의욕과 살아있음의 의미를 부여하듯이, 주님의 다시 오심은 그날까지 더욱 사명에 충성하고 감사와 사랑으로 하루씩을 살아낼 의욕과 의미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미래적 사실은 오늘 우리의 하루가 지극히 소중한 것 되게 만드는 가장 든든한 현재적 자산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온다면 다른 자잘한 것들에 주목하지 않고 다만 그날을 위로로 삼아 즐거운 기분 가운데 기다리듯이, 주님의 다시 오심은 우리가 세상의 작은 것들에 연연치 않고 의젓함과 자족함으로 여전하게 나아가도록 돕는 위로적 신앙입니다.
【추신】 미래에 대한 가르침을 의미하는 종말론(eschatology)은 승리의 미래를 오늘에 가져다줌으로 오늘을 소망 가운데 승리하게 하는 도움입니다. 유의할 점은, 종말론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종말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재를 탈취하여 미래만 바라보게 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경우입니다. 과거적 교리나 미래적 교리는 모두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종입니다. 성도들이 교리의 종이 아닙니다.
남녀의 동행과 신앙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요. 이 표현들은 시간적 24시간이 아니라 의식적 떠올림과 힘입음을 말한다고 할 것입니다. 즉, 하루 중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든, 그것이 내 곁에 있다고 여김으로써 그것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늘 그녀가 그리운 상태, 그녀에게 목마른 상태, 그녀와 함께하고픈 단순하고도 순수한 심정, 존재의 그러한 기분! 사랑하는 남녀가 떨어져 있으면 문자를 밥 먹을 때에도 주고받고, 밥 먹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주고받고, 심지어 샤워를 하면서도 주고받는 것은 ‘항상의 동행’입니다.
남녀의 이러한 동행은 하나님과 우리의 동행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다른 곳에서 무얼 하든지 서로를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우리가 이 땅에서 무얼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남녀가 밥도, 설거지도, 샤워도 상관없이 문자를 주고받는 것이 사랑이듯, 시도 때도 없이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과의 연락을 주고받는 것은 신앙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참으로 닮은꼴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나와 연인의 관계에 있어 안전한 등대입니다.
간지럼의 남녀와 창조주
창조주는 여자에게 간지럼탐을 주시고 남자에게 간지럽힘을 주셨습니다. 여자는 간지럼을 타게 하시고 남자는 간지럼을 일으키게 하셨습니다. 창조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고(창1:31) 아름답습니다(전3:10).
사랑에 빠지면 사람이 개선됨에 대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교만하다는 소리를 듣던 형제가 어느 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는 무척 세심하고 배려하며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랑을 하니까 더 좋아졌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못 만나서 그렇지 사랑다운 사랑을 못 해봐서 그렇지, 하면 좋아집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못 만나봐서 그렇지 만나보면 좋아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향해서 정죄한다거나 포기한다거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 하나님을 못 만난 것뿐인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 체험하면 그는 바뀝니다. 좋아집니다. 심히 좋아집니다. 새 사람이 됩니다.
인간도 관찰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잘 아시겠습니까? 그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그냥 포기하지 않으시는지도 알만하지 않습니까? 왜 죄인들에게도 그 크신 사랑을 베푸시되 십자가에서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하셨는지 조금은 알 듯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누구에 대한 절망을 가질 자격이 없지 않겠습니까?
보전의 책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까먹지 말고 잘 지켜가야 하듯 연인과 사랑의 충만을 누릴 때 그것도 까먹지 말고 잘 보존해서 지켜나갈 것입니다.
저절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충만한 것이 아니듯 연인과의 관계도 저절로 충만할 수 없으리니, 두 관계 모두 신실하고 정성스러운 우선적 헌신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민감성과 죄의 민감성
남녀 관계는 사소한 것으로도 틀어집니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것으로 그렇게 큰 감정의 동요를 겪는지 생각하면 놀라움을 넘어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것은 작은 죄로 하나님 앞에 틀어질 수 있는 우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기도와 말씀 등 외적인 경건 생활이 많아 보여도 속으로 작은 죄를 숨기고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빨간불이 켜집니다. 남녀의 사랑이 민감하듯 죄도 민감합니다.
남녀 관계에서 아무리 겉으로 웃고 평상시와 똑같은 행동을 해도 그 속에 딴 맘을 먹고 있거나 차가운 뜻을 품었거나 사랑이 식은 상태라면 상대방은 이를 즉시 눈치 챕니다. 하나님은 더욱 그러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식거나 죄의 달콤함을 위하여 불순종할 마음을 숨기고 있다면 그의 표정이 평소와 똑같고 그의 경건생활에 빈틈이 없어도 하나님께 그 변화는 생생히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질투
어느 남성이 내 여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때 분노와 질투가 일어날 것입니다. 관계적 소유에 대한 침범은 정당한 질투를 일으킵니다. 하나님께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로부터 질투를 받는다는 것은 가장 깊은 안심입니다. 질투는 사랑의 전투적 표현입니다. 질투한다 함은 상대에게 내가 그토록 중요하다 함입니다. 이를 생각할 때, 하나님을 늘 먼저 생각해드리기 원하는 마음이 솟습니다.
좋음과 책임감
남녀 관계에는 좋음이 있지만 좋은 만큼 책임도 있습니다. 남녀가 서로 입을 맞추는 ‘좋음’의 대가는 서로의 존재와 관계에 대한 ‘책임성’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좋음’)만 아니라 그에 따르는 책임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성령의 강림을 선물로 주시었습니다. 좋아합니까? 사랑합니까? 그만한 책임감으로 증명하십시다.
“정재헌 저, <30대가 30대에게 쓰는 편지 : 사랑과 결혼편>(주의 것, 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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