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서점
진부령으로 이사를 온 지 1년 하고도 9개월이 지났습니다. 저희 집은 행정구역상 고성군에 속해있고 집 앞 길을 건너면 인제군입니다. 그리고 장을 보거나 손님이 오면 속초로 자주 나가게 되고 출퇴근을 위해 미시령 터널을 지나 속초를 지나다닙니다. 서울에서 이사를 올 때 속초와 고성, 인제는 저에게 그냥 강원도, 그러니까 바다와 산이 어우러져 있는 시골마을, 시골학교, 작은 도시 혹은 읍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한적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속초와 인제, 고성에 대한 심리적 경계가 없고 이왕 이렇게 강원도로 이사를 오게 되었으니 읍내나 속초시 안의 아파트 보다는 산 속의 저희 집이 훨씬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왕 강원도 끝자락까지’ 이사를 왔으니 전원다운 전원을 향유하는 것이 도시생활을 버리고 온 일종의 기회비용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속초와 고성 인제에서 오래 살아오신 분들의 생각은 저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멀리서 강원도를 바라보던 저에게는 이 세 지역이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지역 안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오신 분들에게는 세 지역이 확연히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과 가족들을 둘러싼 유일하고도 독특한 고향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사를 와서 제가 주로 다니는 곳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름 손님이 오면 고성의 화진포 해수욕장,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싶을 때는 고성 봉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투썸플레이스, 아이들의 만화책을 읽고 싶을 때 가는 단골 장소 고성 간성 도서관, 식료품을 사야할 때는 인제의 제이마트, 책을 구경하거나 사고 싶을 때는 속초 동아서점, 집에 있기 심심해하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속초 산악 박물관,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해야 할 때는 속초 바다정원, 주로 가고 있는 이 장소들이 지역에서 제가 아는 거의 모든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여러 장소 중 동아서점은 한 달에 두어 번은 꼭 들리는 속초의 서점입니다. 속초의 한 문구점에 들렸다가 돌아가는 길에 동아서점의 외관을 보고 ‘다음에 꼭 들러야지’하고 마음먹었고 한 번 들린 이후로는 쭉 동아서점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책을 많이 사는 남편은 주로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지만, 놀이삼아 서점 나들이를 다니는 아이들과 휴식삼아 책을 사는 저는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 속초에 들릴 일이 있으면 동아서점에 들립니다. 한 겨울에도 화반에 놓인 네 잎 클로버를 볼 수 있는 서점은 아마 여기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동아서점은 1960년대 중반 문을 열었고 할아버지, 아버지를 이어 3대 경영자인 김영건님이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영건님이 얼마 전 「당신에게 말을 건다, 속초 동아서점 이야기」라는 책을 써서 저도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대학 진학을 기점으로 줄곧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고향인 속초에 내려와 서점을 운영하게 된 일련의 과정들이 맛깔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사는 저에게는 그저 느낌만으로 마음에 드는 서점이었지만 서점을 운영하는 이에게는 도서 주문과 구입, 진열, 반품 등 복잡하고 현실적인 문제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지’라고 일반화 시켜 쉽게 생각해 버리고 ‘뭐 저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하고 유별나 보이는 돌에 정을 들이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개개인의 삶 속에서는 속초와 고성의 문화적 차이만큼이나 혹은 지리적 경계만큼이나 서로 다른 실질적이고 세세한 문제들에 대해, 속초와 고성· 인제를 인식하는 저의 두루뭉술한 지남력만큼이나 대수롭지 않게 반응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따듯한 집 밥, 익숙한 거리들, 그리고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친구들과 가족들,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도 고향은 마음속에 온기를 더해주는 그 무엇입니다. 형편이 어려워져 고향을 찾는 사람들도 있고, 이제는 은퇴를 하고 쉼을 위해 고향을 찾는 사람도 있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고향은 이 모든 이들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본향, 떠나온 곳, 여행자의 삶이 끝나면 돌아갈 곳, 우리의 귀향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분이 계시는 곳,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아련하게 그립고 힘이 되어주는 곳, 우리에게는 영적인 고향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형편이 어떠하든지 본향을 기억하고 따듯한 마음으로 나그네의 삶에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홍지향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