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과 제설
어느 어르신께서 지난 2년간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올해는 눈이 많을 것이라고 긴 장화를 준비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미처 긴 장화를 준비하지 못했는데 눈은 연거푸 내리고 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시작된 제설작업은 돌아서면 다시 제자리였습니다. 흩뿌리는 눈은 오후가 되어도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독거노인과 식사를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아동들을 위한 무료급식 배송이 취소되어 사무실은 안내전화를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폭설이 심해 체인 없이 진부령을 오르는 것을 경찰이 단속하고 있다고 하여 저도 2시경에 조기 퇴근을 해서 집으로 왔습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차를 주차한 곳에서 빼내는 것이었고 그 다음은 읍내를 빠져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삽으로 바퀴를 덮은 눈을 걷어내고 차 지붕 위로 쌓인 50센티 가량의 눈을 쓸어내고 미끄러지기를 몇 번 해가며 전진 후진 하다가 차가 도로 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23Km 가량의 꼬부랑 산길을 어떻게 올라가야 할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인근 목사님 댁에서 하루 머물다가 가라고 연락이 왔지만 제가 달리고 있는 도로를 제외하고는 다 눈이 높이 쌓여 차 세울 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앞으로 전진 하는 것 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었기에 좀 더 가면 낫겠지 하고 그대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비교적 길이 완만한 10Km의 도로를 시속 20Km 이하로 달리는 동안에는 길이 미끄러워 돌아가야 할까를 계속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 걱정이지 차는 계속 직진이었습니다. 그렇게 더 이상 갈 수 없나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거짓말처럼 도로 제설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경사가 심하고 급커브가 많은 구간은 빠른 제설로 길이 좋아 무사히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은 일찍 집에 온 엄마를 보고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습니다. 집 앞 제설을 하는 동안 두 아이가 서로 눈에 묻혀서 엄마를 불러댔습니다. 평생 기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폭설의 날이었습니다.
하얼빈 유학시절을 생각해보면 비록 춥고 눈이 많이 왔지만 차들은 얼어붙은 눈길 위를 아무렇지 않게 달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건물의 실내는 온수가 흐르는 난방장치가 중앙난방식으로 잘 설비되어 있었습니다. 겨울이 길었지만 난방에 문제가 생겨 떨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북방지방의 가장 어렵고 취약한 부분, 혹독한 추위에 대한 대비가 확실히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 하루도 난방이 끊긴 일이 없었다는 것이 더 신기한 일입니다. 지금 저희 집은 가끔 보일러가 온수를 제대로 돌리지 못할 때가 있는데 말입니다.
진부령 제설팀은 시베리아벌판에 데려다놔도 눈을 싹 치울 것이라고 저는 우스갯소리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몇 대 안되는 제설차가 얼마나 신속하게 급커브 길을 오가며 제설을 하는지 모릅니다. 눈이 오면 신속히 제설을 할 수 있도록 갖추어진 시스템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폭설에 어려움을 겪고 사고가 나고 고립되는 여러 경험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제설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한 사람들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다녀간 몽골 선교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번에 비자를 변경하는데 발급이 복잡해서 오랜만에 한국에서 한 달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피하고 싶었던 복잡함이 쉼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피해가고 싶은 것들이 삶 속으로 걸어 들어와서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갑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아프고 쓰지만 분명 우리에게 무엇인가 더 본질적인 것을 깨닫는 기회를 줍니다.
생각해보니 도로 제설도 매 한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취약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고, 다음은 그것을 보완해 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는 많은 실패와 고난과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고, 최종적인 보완도 어떤 극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같은 문제에 대해서 점점 더 탁월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피해가고 싶은 문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 모른척하고 싶은 일들에 눈을 감으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탁월성은 어렵고 힘들어도 이런 모든 것들과 직면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모두 무엇인가 한 가지 어려움에 탁월해 질 수 있다면 폭설이 내린 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처럼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혹시 피해가고 싶은 곤란함과 마주하게 된다면 눈 감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탁월해지기로 다짐해 봅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씩 더 탁월해져 간다면 하나님이 충성되다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홍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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