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빚
한자어 죄(罪)는 아닐 비(非)와 그물 망(罒)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중국인들은 죄를 법의 그물망에 잡힐 만한 그릇된 일로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죄에 대한 은유로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다. 실제로 히브리어에서는 ‘죄’를 가리키는 말의 원뜻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모든 사람 가운데서 뽑힌 칠백 명 왼손잡이들은 무릿매로 돌을 던져 머리카락도 빗나가지 않고 맞히는 사람들이었다.”(삿 20:16) 사사기의 이 구절은 ‘죄짓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חטא’(하타)가 원래의 뜻인 ‘빗나가다’로 쓰인 곳이다. 그러니까 구약의 의미에서 죄는 원래의 목적을 벗어난 상태, 또는 그것으로 인한 결과라는 의미가 된다. 창조의 원래 목적을 벗어난 상태를 우리가 원죄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신약의 헬라어에서 ‘죄’를 뜻하는 ‘ἁμαρτία’(하마르티아) 역시 원래는 ‘빗나가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죄에 대해 빗나감의 은유와는 다른 은유를 즐겨 사용하는데 그것은 바로 ‘빚’이라는 은유다. 형제가 자기에게 진 죄를 몇 번까지 용서해줘야 하냐고 물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을 말씀하신 후 왕에게 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마 18:23-35)를 들려주셨다. 그리고 한 바리새인이 예수의 발에 눈물을 흘리고 향유를 부었던 여인을 죄인으로 정죄했을 때 역시, 주님은 더 많이 탕감 받은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여인의 죄 사함 받음을 선포하셨다. “둘이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돈놀이꾼은 둘에게 빚을 없애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눅 7:42)
하지만 신약에서 죄와 용서에 대한 빚과 탕감의 메타포가 결정적 빛을 발하는 곳은 무엇보다 <주기도문>에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상당한 의역인 이 문장을 원문에 따라 직역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들을 탕감해 주시옵고.” 이처럼 예수님은 죄를 빚나간 과녁보다는 빚으로 표현하신다. 하나님께 지은 죄는 하나님께 갚아야 할 빚이고, 타인에게 지은 죄는 타인에게 갚아야 할 빚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감각 역시 죄책감이라는 표현보다는 부채감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부채(負債), 빚을 ‘지다’(負)라는 표현처럼 무거운 짐을 짊어진 상태와 기분, 죄를 지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죄의 용서가 빚의 탕감이라면 이 얼마나 홀가분한 일이 될 것인가, 전 인생을 짓누르는 빚을 탕감 받은 자의 삶은 얼마나 큰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인가.
탕감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빚이듯이, 용서의 대상 역시 사람이 아닌 죄라는 것도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다. 사람을 사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하는 것이라면 이때 사람의 자리는 무엇일까.. 이처럼 빚과 탕감의 은유는 죄와 용서에 대한 다양하고 새로운 관점을 가능케 한다. 곰곰이 따져보면 죄 사함과 빚 탕감의 모티브는 비단 신약에서만이 아니었다. 단 한 번이라도 지켜졌더라면 인간에게 지상최대의 축복과 해방의 경험을 선사했을 대대적인 빚 탕감의 해 희년, 이 희년의 선포는 바로 대속죄일에 일어났다. 아마도 이것은 영혼의 죄 사함은 물질적인 빚 탕감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주기도문의 빚 역시 죄에 대한 은유만이 아니라 직접적인 물질의 빚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찌 되었든 우리는 죄를 용서 받은 자들, 값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은 자들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렇다면 죄가 무엇이든, 용서의 이유는 언제나 이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마 18:32-33)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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