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눈물’ 소녀상
작년 12월 31일,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 설치한 소녀상을 두고 한일 간 외교 갈등이 급등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보다 한 해 전인 2015년 12월 28일에는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협상하여 타결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양국 외교부 장관이 불가역적(不可逆的)으로 최종 종결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사과도, 법적 책임도 없이 더 이상 위안부 문제을 거론할 수 없게 된데 대해 할머니들은 “우리를 두 번 죽이는 거냐”고 크게 반발하였다.
소녀상 설치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일본 당국의 태도를 보면서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제 발 저린 행태를 자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미국 부통령까지 끌어 들여 소녀상 철거문제에 대해 중재를 하게 하려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일본이 일파만파 문제를 확산시키는 것에 대해 먼저 박근혜 정부의 자책골에 화가 나면서도, 해방 70년이 넘도록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사죄하지 않은 채 어물쩍 넘어가는 일본 정부의 노회함에 분노가 치민다.
지난 해 만든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는 일본이 대동아전쟁 중 행한 잔혹상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일본이 저지른 국가범죄 앞에서 한 개인이 치룬 목숨 값이 얼마나 가볍던가 싶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시인 윤동주는 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같은 무게만큼 조명될 수 있지만 ‘나머지’로 분류되는 숱한 한 사람 한 사람은 누가 그를 기억하고, 기념할까 싶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일본의 죄책을 끝없이 물어야 하는 이유이다.
몇 해 전 평화기행이란 이름으로 일본 간사이 지방을 다녀온 적이 있다. 최근 일본화 약세로 일본행 관광객이 급증한다지만 그들 중에서 얼마나 민족수난의 흔적을 가슴에 담아 올까 싶어 마음이 불편해진다.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가 있는 도시샤 대학은 물론 우지 시에 있는 우토르 마을, 폐쇄 위기에 직면한 교토의 조선제1초급학교 등 재일조선인이 지닌 아픔의 흔적을 만날 기회는 어디나 넘쳐난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잔인성을 보여준 조선인의 ‘귀 무덤’(耳塚)이 여전히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당 앞에 존재한다.
잠시 일본을 방문하면서도 단연 내 관심사는 십자가였다. 나라 시에서 본 성공회 성당의 십자가는 지극히 일본스러웠다. 오사카 궁에서는 쇼군 시대 무장들이 문장으로 사용한 십자가 상징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일본에서 십자가를 수집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재일동포의 삶을 십자가로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재일동포의 삶과 인권을 대변하려고 애써온 재일대한기독교회의 노력은 눈물겹도록 고맙게 느껴졌다. 그 중심에는 1968년 선교 60주년을 맞아 설립한 오사카 재일한국기독교회관(KCC)이 있었다.
재일대한기독교회는 1908년에 출범하였다. 재일동포 사회의 중심인 오사카 교회는 1921년에 설립하였는데 처음에 주축은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10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방직산업은 일본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오사카 기시와다 방직회사(1892-1941)도 그 중에 하나였다. 이 회사는 유난히 조선 처녀들이 많아 ‘조선방직’으로 불렸는데, 조선인 여공만 무려 3만 명이었다.
기시와다 방직은 값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로 모집인을 파견하였다. 조선의 농촌여성들이 표적이었는데, 대부분 경상남도와 제주도 출신으로 그 중에는 12-13세의 소녀들도 적지 않았다. 방직공장 노동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어 2교대, 12시간 노동을 시켰는데, 휴식은 점심시간 30분에 불과하였다. 무엇보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였다.
일본에서 가까스로 구한 십자가는 공교롭게도 기시와다 방직공장 건물의 외벽에 각인된 붉은 벽돌이었다. 기시와다 벽돌공장은 자사제품에다 회사 브랜드(社章)인 십자가를 새겨 넣었다. 초대 사장인 야마오카 타다가다는 그리스도인이었다. 훗날 벽돌회사를 계승한 테라다 진요모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십자가 각인은 계속 유지하였다. 그리고 테라다 재벌 안에 편입된 기시와다 제품 십자가브랜드의 적벽돌이 기시와다 방직회사의 공장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나는 그 적벽돌에 새겨진 그리스 식 십자가에 ‘붉은 눈물 십자가’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첫눈에 표면에 찍힌 십자가 형태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아픔을 헤아리려는 눈빛으로 더듬을 때, 십자가는 붉은 눈물처럼 가슴을 적신다. 기시와다 벽돌에 새겨진 십자가 흔적은 조선인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과 피와 다름없었다. 그렇게 일본에 의해 찢겨지고, 생매장된 영혼과 넋이 있음에, 어찌 오늘의 ‘소녀상’인들 무언의 항변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녀상은 전국 방방곡곡에, 학교와 광장마다 그리고 무심했던 역사의 기억마다 세워져야 한다.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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