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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24]
 
 
 
     
 
 
 
작성일 : 17-01-06 23:47
   
저주와 각성
 글쓴이 : dangdang
조회 : 331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07 [193]


저주와 각성


김성중의 소설집 <국경시장>에 수록된 단편 <쿠문>은 동생의 재능을 시기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지성에 있어 자신보다 뒤쳐졌다 여겼던 여동생의 학문적 성공에 주인공은 마치 카인과도 같은 질투에 휩싸인다. 그러다 언니의 의도적 부주의로 동생은 사고를 당하고, 사고를 당한 동생은 몸과 정신이 불구가 되어 사회로부터 퇴출된 채 요양원에 지내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질투의 이유는 사라졌으나 죄책감의 짐을 지고 삶의 의미조차 상실된 중년의 주인공, 때마침 그녀 앞에 한 비밀스런 천재 청년이 등장한다. 이 청년의 비밀은 ‘쿠문’이라는 병이었는데 발견자의 이름을 딴 이 병은 다름 아닌 모든 분야에서 천재가 되는 병이었다. 이 병의 치명적 부작용은 수 년 내로 사망한다는 것.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는 이렇게 재능에 대한 동경과 질투, 죄책감 등이 고루 배어있다.


모든 질투는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지니는 부러움이 아니라, 덜 가진 사람이 지니는 부러움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면에서 아예 아무것도 가지지 못 한 사람은 그 면에서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할 수는 있겠지만 그 부러움이 질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아예 없는 사람은 있다는 기분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투는 가지지 못 한 것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언제나 덜 가진 것에 대한 절망이다. 일단 맛본 것에 대한 열망이지 전혀 모르는 맛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과 악에 대해 아예 알지 못 했던 최초의 인간은 질투로 인한 괴로움 또한 몰랐다. 그러나 한 번 앎을 맛본 순간부터 인간은 신의 앎에 비견된 자신의 앎이 알몸과 같은 처지인 것을 즉시로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알몸을 수치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질투라는 저주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아 알게 된 카인이 자신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여긴 아벨을 질투한 것은 당연한 저주의 대물림이었다. 그리고 우리 또한 모두 카인의 후예로 이 질투의 저주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이 질투라는 저주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천재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왜 질투하는 인간이 되었는지, 결코 선택한 적 없고 되고 싶지 않던 모습의 노예로 살아야 했는지, 내가 왜 카인이 되어버렸는지를 알고 싶었다.” 다행히도 소설 속의 주인공은 자신의 삶에 걸린 저주에 대해 각성하게 된다. 각성(覺醒), 각성이란 깨달아 깨어나는 것이다. 아, 내가 질투의 저주에 사로잡혀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 취한 잠에서 깨어나 병들어 불구가 된 자신의 영혼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질투라는 저주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일은 바로 이 각성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원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상기하는 일일 것이다. 원죄라는 말은 너무나 교리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이미 지나버린 태고의 이야기와 묶여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말처럼 들리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는 원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런 건 옛날이야기에나 있는 것처럼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 예수께서는 분명 십자가 위에서 죄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셨다. 그러나 결정적 승리이지 완전한 승리는 아니다.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는 주님이 다실 오실 때까지 유보되어 있다. 그때까지는 여전히, 원죄의 결과인 죽음이 우리의 삶을 짓누를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원죄와 더불어 산다. 이 원죄에 대해 끊임없이 각성된 채로 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쉽게 저주에 걸려들고 말 것이다. 원죄를 뜻하는 영어 ‘original sin’의 오리지널처럼 원죄는 늘 본래적이고, 날마다 독창적으로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죄의 저주를 벗어나기 위한 첫 걸음으로서의 각성, 이 처절한 각성으로 하나님의 해결책에 이르렀던 바울의 외침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롬 7:24)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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