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편지 캠페인
어느덧 송년의 계절이다. 한해를 보내는 것이 아쉬워 송년모임에도 기웃거리고, 고마운 사람을 생각하며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도 한다. 몸보다 생각이 바쁜 일상에서 진심어린 속마음을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성탄일이나 송구영신에 닥쳐서 경쟁적으로 이모티콘 인사를 남발하는 것이 익숙해진 세태일수록 더욱 그렇다.
독일에서 목회하던 20년 전 일이다. 당시 복흠 멜란히톤교회 슈뢰터, 슈타인-뷔테 두 목사와 송구영신을 앞두고 가볍게 송년모임을 했다. 마침 은퇴를 앞둔 오르겔 연주자 부부도 함께 하였다. 독일교회는 연말이면 각종 회의로 분주해, 밤마다 교회에서 모임이 열린다. 늘 두터운 바인더노트를 들고 다니던 그들이지만, 그날 저녁만큼은 빈손이었다.
그만큼 편안한 자리였다. 둘 중 누군가 내게 평소 취미생활을 물었다. 순간 딱히 떠오르는 적당한 대답이 없었다. 별로 취미가 없는 내 약점을 들추어내는듯하여 대답에 머뭇거렸다. 그러다 불현 듯 떠오른 생각으로 ‘편지쓰기’라고 말했다. 사실 짧은 독일어 때문에 가장 쉬운 답안을 찾은 셈이기도 했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참 좋은 취미를 가졌다”며 덕담 일색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고상한 정답을 고른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나는 궁색했던 대답에 책임을 지느라고 이듬해 정월 초하루부터 취미생활을 열심히 해야 했다. 아마 일 년 동안 200통 이상 엽서를 보냈을 것이다.
여유 있는 취미생활이 아닌, 스스로 강요한 ‘편지쓰기’ 의무를 하느라 매일 편지 쓸 대상자를 마음에 두고 살았다. 그 때 그 때 상대에 따라 골라 쓰기 위해 괜찮은 엽서 고르는 안목도 높였다. 그만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기울였더니 그해에는 유난히 관계가 풍성했던 따듯한 기억이 남아있다. ‘가는 정 오는 정’이라고, 가장 많은 엽서를 받은 해이기도 하였다.
요즘 수요기도회에서 바울의 편지를 공부한다. 바울의 편지들은 서언과 결미에서 공통된 특징을 읽을 수 있다. 따듯한 문안과 정중한 인사는 단순한 인사치례를 넘어, 사도가 자신이 상대하는 교회와 사람에 대해 얼마나 친숙하고 친밀한 존재인가를 느끼게 한다. 그는 불가피하게 편지라는 수단을 이용했지만, 편지들은 단지 편의적 도구가 아닌 인격적 소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편지는 꾸준히 회람되면서 마치 바울 얼굴 대하듯 반가움을 주었을 것이다.
몇 주 동안 바울이 쓴 편지에 감동을 받아 나는 20년 전 내 송구영신의 추억을 발동하였다. 아뿔싸, 내년에 다시 엽서쓰기 취미를 되살려야겠다고 말을 꺼냈다. 손 글씨와 엽서가 점점 사라지는 스마트 시대에 나부터라도 문명을 거스르는 귀찮은 작업을 해야겠다고 선언하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손으로 글을 쓰지 않으며, 엽서조차 구하는 일이 수월치 않다. 그러다보니 이젠 편지쓰기도 더 이상 취미가 아닌, 오기로만 가능해지고 말았다.
심지어 지금은 편지 쓰는 일이 아주 고전적인 일로 치부되기 십상이 아닌가? 가장 오래도록 문명사회가 습득해온 필기수단과 소통방식을 불과 몇 년 새 폐기처분한 것이 과연 적절한 선택인지, 합당한 진보인지 묻고 싶었다. 이제 편지쓰기는 신촌 현대백화점 지하통로의 ‘느린 우체통’처럼 특별한 이벤트로 남았다. 여기에 편지를 넣으면 1년 후에 배달된다고 한다. 아마 미래의 자신에게 오늘의 내가 보내는 편지가 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고후 3:2)라고 말한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내신 희망의 메시지요, 풍성한 사랑의 감정을 담은 하늘의 연애편지와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도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편지로 전달되고, 또 그런 사랑의 전달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아보니 엽서쓰기는 내 하루의 영성과 관계를 부요하게 만들어 주었더라. 그래서 잊고 산 옛 취미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런 귀찮은 의무일망정 일용할 수고처럼 부담을 지고 싶다. 손가락 ‘편지쓰기’가 아닌, 가슴으로 쓰는 ‘편지쓰기’가 많은 이들의 호응을 불러내기를 기대한다.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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