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는 것들의 실상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 박해의 시대를 살았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을 현실로 살아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예수를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 말씀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직 되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점쟁이와 같은 예언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말하고, 바라는 것을 이룬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아니 그것 보다는 우리가 아직 주어지지 않은 것을 오늘날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이다. 예수의 재림이 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종말의 때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에 이미 이루어진줄 아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했다.
세상을 살면 우리는 실망하게 되는 때를 만난다. 악이 성하여 지는 것을 보면 의를 따라 살았던 우리는 절망에 마주하게 된다. 의는 항상 박해를 살았고, 갇혀진 듯 살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절망에 갇히지 않고 소망을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불구덩이로, 사자의 우리로 찬송하며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악이 성할지라도 끝내 의가 승리할 것이고, 악이 아니라 의가 예수의 가치인 것을 알기 때문이고, 끝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바로 이 앎에 근거해서 우리는 악이 성해도 의롭게 살고 있는 것이고 보이지 않지만 이루질 것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악하고, 그 악이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때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국민들은 그 악한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광장으로 나섰고 끝내 승리를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바라는 것은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악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내게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긍정적으로 대답할 자신이 없다. 지난 대한민국의 과거를 돌아본다면 절대 그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꿈을 꾸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놈이 가끔 분통을 터뜨린다. 학교에서 불공평한 경우를 당한 것이다. 무슨 대회를 치렀는데 무효라고 다시 한단다. 아이는 짐작한다. 어느 놈 집안이 잘 산단다. 그 놈이 1등을 못해서 그럴 거란다. 그러면서 분통을 터뜨리지만 학교를 바꾸지는 못한다. 애비된 입장에서 그 부당함에, 그 불의에 항거하고 바꾸라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그게 얼마나 큰 어려움을 가져올지 지레짐작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런 거라고, 억욿하면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하라고 한다. 내가 스스로 부끄럽다. 이렇게 이야기해야하는 내가 부끄럽다. 그리고 아이에게 이렇게 밖에 말해주지 못하는 세상이 실망스럽다. 그래도 내 아이만큼은 그 힘든 길을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큰 것이다.
내 아이는 좀 이런 고민 안 했으면 좋겠다. 정의로워서 부끄럽지도, 실망스럽지도, 절망스럽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 믿음이 이 실상을 살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조성돈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