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결코 단순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살아가고 돌아보며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사실은 모든 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특별히 질곡의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면 이런 인상은 더욱 더 지울 수가 없다. 영원히 갈 것 같은 악한 권력이 결국에는 소멸하나 그 뒤를 이어받은 선한 권력도 곧이어 재빨리 뒤따라 온 다른 악한 권력에 속절없이 자리를 내주곤 한다. 악하고 무능한 지도자는 시대를 막론하고 때만 되면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오신다는 주님은 아직 오시지 않고 세상은 평화를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은 더 늘어나기만 한다. 이 모든 인간 고통에 두려움만 가득 찰 뿐이고 그 지겨움은 끝도 없다. 끝도 없는 지겨움을 가져오는 이 역사의 무한 반복, 역사를 지켜보며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이런 허무주의는 어렵사리 얻은 역사의 승리조차 마음대로 즐기지 못하게 한다. “잠시 후면 또 악이 득세하고 말 텐데 뭐.” 힘겹게 성취한 승리에 채 도취되기도 전에 이런 체념이 이미 얻은 승리 위에 벌써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 주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역사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렇게 무의미하게 반복만 되고 마는 것일까? 역사가 발전한다는 믿음은 헛된 소망을 품은 이들의 허상일 뿐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역사는 결코 단순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함석헌 선생은 역사의 발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역사는 결코 꼭같은 것을 영원히 되풀이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生) 것이기 때문에 그 운동은 그져 되풀이 되풀이 끝없이 하는 운동이 아니요, 자람이다. 생명은 진화한다. 적게 보면 되풀이하는 듯하면서 크게 보면 자란다. [...] 그러므로 역사의 운동은 차라리 수레바퀴나 나선의 운동으로 비유하는 것이 좋다. 수레의 바퀴는 밤낮 제자리를 돈 것 같건만 결코 제자리가 아니라 나간 것이요, 나사는 늘 제 구멍을 돌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올라가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의 말처럼 역사는 마치 소용돌이치며 아래로 파고드는 나선운동과도 같다. 그저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돌면서 파고드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생물(生物)처럼 자라고 하나님의 종말을 향하여 나아간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키려 애쓰는 싸움 역시 부질없는 반복일 수 없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눅 10:18)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승리하신 사탄과의 전쟁 앞에서 이제는 그 잔당들과의 국지전투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남은 사탄의 잔당들은 더욱 더 발악할 것이고, 그러니 이 싸움 또한 힘겹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우리는 이미 이긴 승리 속에서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내 안에 여전히 있는 이것은 마치 이미 얻은 승리 앞에서 타격을 입고 혼란에 빠져 퇴각하는 부대와 비슷한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 속에서 자신의 갈등과 나약함을 숨김없이 고백했던 본회퍼 목사님은 그럼에도 ‘이미 얻은 승리’라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불안과 흔들림을 이렇게 끝맺을 수 있었다.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나를 아시오니,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이 승리한 전쟁을 잊지 말도록 하자. 그러니 지금은 이제 막 이룬 정의의 작은 승리를 마음껏 기뻐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남은 싸움을 계속해보자. 주님은 지금도 오고 계시다. 그러니 우리도 마중을 가자. 예수께서 이미 승리하신 전쟁에 우리의 작은 힘을 보태면서, 나선처럼 파고들어 자라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면서, 주님의 오심을 맞는 우리가 되자.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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