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혹시 보드게임을 좋아하시나요? 귀가하면 더 이상 놀 거리가 없는 아이들이 근래에는 보드게임을 하나씩 섭렵하고 있습니다. 젠가와 다이아몬드게임은 이사를 오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라 한동안 가지고 놀았습니다. 하던 것을 계속하자니 지겨워진 아이들이 도미노와 체스를 사달라고 졸라서 속초 마트에서 샀습니다. 사실 저는 게임과 담을 쌓은 사람이라 아이들에게 배워가면서 게임을 합니다. 한동안 큰아이 작은아이와 번갈아가며 체스게임을 하다가 며칠 전 인터넷으로 주문한 새로운 장난감이 왔습니다.
새 장난감은 주사위를 던져 여행을 하면서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통행료를 받으면서 게임을 이어가는 브루마블입니다. 아이들은 며칠 동안 인터넷으로 주문한 브루마블 게임이 언제나 도착하나 애가 타서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두 아이의 환호성과 함께 브루마블이 도착했고 잠 못 드는 밤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날 장장 4시간여를 게임을 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저녁 이어지는 브루마블 게임에서 파산을 할 것 같거나 원하는 땅을 구매하지 못하면 울거나 화를 내면서도 두 아이는 계속 게임을 했습니다. 마음처럼 되지 않아 작은아이가 게임에서 나가버려도 큰아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제가 빨리 파산해서 게임이 끝나기만을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저는 속으로 이것은 흡사 게임고문과도 같다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체스나 바둑과는 차원이 다른 장거리 마라톤 같은 게임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녁이면 게임을 즐기고 아침이면 눈을 뜨기 힘들어 하던 큰 아이는 이틀 동안 코피를 쏟았습니다. 코피를 쏟고 몸이 피곤해도 그만하자고 하면 아쉬워하고 더 하고 싶다며 투정을 부립니다. 아무리 즐겁고 재미있어도 피곤하면 그만하고 쉬어야 한다며 어렵사리 게임을 중간에 끝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3주전부터 다시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읍에 있는 지역자활센터에서 일하기 시작해서 적응해 가고 있는 단계입니다. 지난 토요일 낮에 동료들과 함께 지역아동센터 벽화그리기 자원봉사를 가야했는데 큰아이가 선뜻 따라나서겠다고 해서 페인트가 묻어도 상관없는 허름한 옷을 각자 준비해서 갔습니다. 이미 도안은 그려진 상태로 색칠만 하면 되는 일이라 오전이면 금세 끝나겠다 싶은 것이 제 계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전 10시에 시작된 색칠작업은 성인12명이 함께 열심히 했지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점심으로 자장면을 시켜서 먹고 오후 2시가 되어서야 1차 작업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사실 저희가 한 작업은 이미 바탕색을 칠하고 도안을 그려놓은 위에 색칠을 하는 것이었고, 저희가 한 칠이 다 마르면 다시 라인을 그리고 색을 덧칠해야 하기 때문에 전체 벽화 작업에 있어서는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저는 또 혀를 내두르며 벽화그리기가 이렇게나 어려운 작업이었는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쓱쓱 쉽게 그림을 그리면 그 위에 색칠을 하면 되는 단순작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처럼 벽화그리기 봉사활동은 제가 전화해서 섭외한 것이었습니다.
고작 식사시간을 포함해서 4시간 벽에 붓질을 하고나니 기운이 쭉 빠지고 어서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마추어 봉사자들의 색 조합 뒷바라지를 해주시느라 애쓰신 벽화사업단 분들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자활센터 소속인 벽화사업단은 연세가 많거나 건강이 좋지 않거나 이주여성이어서 생계를 위한 마땅한 직장을 얻기 어려운 분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벽화 의뢰가 들어오면 힘을 합쳐 새로운 도안을 연구하고 그린 후 의뢰한 곳과 합의하여 수정하고 선정한 후 벽화 작업을 하러 나갑니다. 이 일을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해 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저의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가교는 체험이었습니다. 몸으로 직접 해보는 것이야 말로 가장 좋은 공부이고 이해였습니다. 아이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며 간식만 챙겨줄 때의 브루마블과 직접 함께 참여하는 브루마블은 달랐습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되는 것은 없었습니다. 이해하려면 함께 해야 하고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말을 하지 않아도 왜 힘든지, 어떻게 어려운지,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진지한 놀이를 유치한 장난쯤으로 치부해 버린 것, 타인의 모진 노동을 쉽게 생각한 것을 깊게 반성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인간의 몸을 입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약함과 아픔을 이해하셨고 용서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영혼들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진지한 사랑과 모진 수난으로 지금 여기 우리가 존재합니다.
오늘 하는 일이 무엇이 되었든지 단순히 머리로만 알고서 다 아는 것처럼 교만해지지 말고, 오늘 만나는 사람이 누가 되었든지 그 사람을 진지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제 안에서 조금씩 닮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홍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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