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으로 바위치기
지난주를 마지막으로 저는 일 년간 일하던 직장에서 퇴사하였습니다. 바쁘고 힘든 와중에도 서로 보듬고 도우며 일하던 동료들과 헤어짐이 아쉬웠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지고 나왔습니다.
요즈음 “불편해도 참겠다.”며 금융노조 파업과 철도파업에 릴레이 대자보를 붙이는 시민들이 있어 연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뉴스를 볼 때마다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자신의 불편을 참고서라도 다른 근로자의 권리가 지켜지는 것을 지지하겠다는 의미이니 말입니다. 노동조합은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을 유지 혹은 개선시키고 근로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연합단체”(노조법 제2조, 제4호)입니다. 그리고 파업은 협상의 한 방법이며, 자주적인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은 헌법 34조가 보장하고 있습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서로간의 양보와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어느 한쪽만의 이익을 위해서 사업체를 운영할 수 는 없습니다.
편지에 난데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지난 1년간 일하면서 제가 겪은 일들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자리에서 물러난 설립자가 수시로 드나들며, 직원들을 불러다 놓고 하는 말이 “노조를 만들지 말라”였습니다. 학생들의 취업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노조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며 그것을 반드시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여름에는 전체 직원을 휴가 보내고 근로자에게 불리하도록 취업규칙을 개정하기 위한 의견수렴 기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노동조합 설립의 소극적 요건에 속하는 사용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다수 참여한 가운데서 회의를 하였습니다. 학생들의 모의면접에서는 “노동조합에 참여할 것이냐?”라는 질문을 함으로서 노동조합을 불법적인 집단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한 사람의 근로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노동조합을 형성하고 활동하는 것은 근로자의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백남기 농민의 사망 사인이 ‘병사’라는 것에 대해서 서울대 의대생들이 대자보를 붙였고 졸업한 동문들이 이에 대한 답변을 쓴 대자보를 다시 붙였습니다. 정치적인 견해는 열이면 열 다 다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의문이 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이야기 하고 토론하고 수정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대생들이 ‘외상의 합병증으로 질병이 발생하여 사망한 경우에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사망의 종류는 ‘외인사’입니다.’라고 쓴 것은 정치적으로 바라볼 문제가 아닙니다. 의료 전문가라면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한 것입니다.
돈과 명예,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은 배우고 익힌 것들을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합니다. 같은 일을 상황에 따라서 옳다고 하거나 그르다고 합니다. 사실 누군가 옳다고 한다고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것을 그르다고 호도한다고 해서 그른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옳고 그름은 본질은 여전하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말과 이 말들을 다시 재생산 해내는 이들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준이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말씀을 이리저리 다르게 적용하고 이용한다면 앞서 말한 이들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대로 살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속입니다. 이런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함에도 불고하고 함께 ‘눈을 가리고 아웅’하고 있다면 답답한 일입니다. 저도 세상을 따라 돈과 명예와 권력을 쫓아 빈틈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퇴사하면서 책을 한 권 선물 받았습니다. 요즈음 유행한다는 여백이 많은 책이었습니다. 한 페이지에 한두 줄의 글귀만 써져 있는 돈 주고 사기 아까운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읽어야 할 것은 글이 아니라 여백이었다고 하는 것이 차라리 맞겠습니다. 여백이 있음으로 인해서 그 책은 활자를 통해 저자의 생각을 전달하는 책이 아니라 저의 생각을 채워가는 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여백을 통해 삶의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돈과 명예를 쫒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엇이 정말 옳은 것인지 스스로 돌아볼 틈도 없이 떠밀리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행히도 저에게는 영적인 여백인 예배가 있습니다. 아무런 세상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성스러운 공간과 시간이 있다는 것은 흔들릴 때마다 추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멀리 있지 않고, 신앙은 공허한 구호가 아닙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함께 질문하고 바로잡고 선한 일에 참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돈 주고 사기 아까운 책을 공들여 읽는 것처럼, 열정을 쏟아 하기에는 의미 없어 보이는 구석진 일에 저는 오늘 상상력을 발휘하려고합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에 게을러지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홍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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