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좋다는 것
‘믿음이 좋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금방 잡힐 듯하면서 잘 잡히지 않는 개념이다. 예수께서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다. ‘믿음이 좋다’ 혹은 ‘믿음이 없다’고 말하는 자체가 바로 판단이다. 그렇기에 믿음이 좋은지 안 좋은지를 말하는 것 자체가 녹록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히 믿음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믿음이 좀 모자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 그냥 덮어 두고 지나갈 사안은 아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큰 딜레마 중의 하나가 바로 믿음에 대한 규정이다.
성도들이 믿음 좋은 이가 되길 위해 노력하는 게 바로 목회가 아닌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는 일, 천국에의 소망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 천국에의 소망을 갖도록 돕는 일, 봉사 헌신하지 않는 이들에게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게 바로 목회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 않다. 구원의 확신을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남이 하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천국의 소망도 내가 갖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남이 갖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봉사 헌신 또한 내가 하면 되는 게 아니고 남더러 그렇게 하라고 인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는 어렵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남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인도를 받는 이들이 그렇게 순종적으로 따라 주지 않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
가끔 이단들이 더 열심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종교적 열심이 있었듯이 말이다. 그럼 이들이 믿음이 좋은 것인가. 분명히 아니다. 그들은 그릇됨에 근거하여 열심을 갖는 것이라 그렇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첫째로, 소신이나 뚝심이 아니다. 그것의 기원은 나에게 있지만 믿음의 근원은 나 아닌 다른 곳이다. 즉, 하나님이 바로 믿음의 근원이다.
둘째로, 믿음은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다른 이들이 가진 것과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사회에 폐해를 주거나 사회를 무시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셋째로,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성경에서 주장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의 검증에 합격해야 한다. 오랜 세월을 두고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 참 믿음이다. 믿음은 그래서 전통이 있다. 이는 믿음이 위기 대처 능력이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평소에는 믿음이 하늘을 찌르는 것 같다가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주춤거리고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히는 이들을 자주 만난다. 이들은 믿음이 없는 이들이다. 어떤 재능이나 힘을 소유하였느냐를 묻기 전에 그것의 근원이 어디이고, 그것의 끝이 어디인가를 물어야 한다.
달리기를 아무리 멋지고 빠르게 하여도 결승점에 이르지 못한다면 믿음이 아니다. 열심이 하늘을 찔러도 믿음이 소신에 밀리고 있다면 믿음이 아니다.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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