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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24 00:11
   
농부와 어부 – 하나님의 창조를 유지시키는 사람들
 글쓴이 : dangdang
조회 : 274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262 [207]


[농어촌선교주일을 보내며]
농부와 어부 – 하나님의 창조를 유지시키는 사람들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창 1:29-30)


육 일간에 걸친 창조의 마지막은 이 말씀과 함께 끝이 났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 둘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바로 직전에 하나님은 그 둘에게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축복의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예배가 언제나 축도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 역시 거기서 끝났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축복의 말씀 직후에 바로 위의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리하여 위의 말씀은 성경의 처음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와 관련된 마지막 말씀이 되었고, 그것은 바로 먹거리에 관한 말씀이었다.


말씀에 따르면 창조 시 하나님은 인간에게 먹거리로 채소와 열매를 주셨다. 채식은 동물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푸른 풀이 먹거리로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인간은 채소와 열매만 먹고 살지 않고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육식에 대한 성경의 첫 언급은 노아 홍수 이후, 즉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의 말씀에서였다.(창 9:1-4) 창세기 1장의 축복의 말씀과 비슷한 축복의 명령이 여기서는 다소 달라져있다.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동물들의 두려움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보살핌의 다스림이 공포정치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은 산 동물도 인간에게 먹거리로 주신다.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의 권장사항이 아니라 이미 왜곡된 타락한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양보다. 절대로 피를 함께 먹지 말라는 명령과,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이 허락의 잠정적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하여 성경은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왜곡된 자연의 질서가 태초의 목적대로 회복될 때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사 65:25) 이것은 다름 아닌 창조 처음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그러니까 이제 우리 모두는 당장 태초의 채식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인간으로 말미암아 타락된 창조의 질서는 인간의 의지로 고쳐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의 회복은 초월적 종말에나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원래 창조질서를 회복시킨다고 육식동물에게 채식을 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을 비롯한 잡식동물들을 모두 채식으로만 강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방향은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다른 생명에 대한 존중, 가축에 대한 윤리적 사육과 도축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교회는 지난 주일을 농어촌선교주일로 기념하였다. 모든 생명을 위한 ‘먹거리’에 대한 언급이 하나님 창조의 마지막 말씀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은 이 농어촌선교주일과 관련해서도 특별히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본질적으로 먹거리란 무엇을 의미할까? 먹거리는 바로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인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전체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소중하다 할지라도 유지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창조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 창조와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먹거리를 주신다. 그러기에 성경은 만나의 이야기나 오병이어의 이야기에서처럼 떡(밥)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상징으로 곧잘 나타내곤 했다. “나는 생명의 떡(밥)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먹거리는, 밥은 생명이요 은혜다.


농부와 어부는 바로 이 전체의 생명과 전체의 창조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 말씀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도 생명과 창조를 유지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수고를 통해 우리의 식탁에 오른다. 농부와 어부는 바로 이 수고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 유지를 인간들에게 연결시켜주는 전달자들이다. 이렇게 다른 이들보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하늘에 대한 겸손이 몸에 밴 사람들이기도 하다. 비와 태양과 바람과 파도는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님을 절실히 아는 이들이기에, 모든 수확이 결국은 하늘의 허락에 달린 것을 아는 이들이기에,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 유지를 전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농어촌과 그곳의 교회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일은 비단 신학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순전히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먹거리의 문제는 몹시도 중요하다. 국제사회의 문제에서 쌀시장 개방과 관련된 문제 제기에서 쌀만큼은, 먹거리만큼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되다는 농부들의 주장은 결코 자기 이익을 지키겠다는 이기심이 아니다. 값싼 먹거리의 수입으로 이 땅에서 모든 먹거리 생산이 중단되었을 때 닥쳐올 수도 있는 국가적 위협, 바로 식량주권의 문제 때문이었다. 국내사회를 들여다보더라도 마찬가지다. 먹거리는 빈부의 격차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온 사회가 소셜미디어를 위해 먹거리에 폭발적인 관심을 쏟고, 푸드 포르노라 부를 만큼 음식 방송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무료로 주어지는 한 끼니를 위해 피곤한 줄을 서는 사람들도 여전히 이 사회에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교회의 할 일은 무엇일까. 교회는 영적인 차원과 물질적인 차원 모두에서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하는 존재요 기구다. 먼저 교회는 창조의 마지막 말씀으로서의 먹거리와 이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의 신학적 중요성과 의미를 깊이 숙고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생명과 창조의 유지를 위해 애쓰는 농부와 어부들을 영적인 차원과 물질적인 차원 모두에서 힘을 다해 지원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를 유지하는 먹거리가 이 땅에서 바르게 생산되고, 바르게 전달되며, 바르게 나눠지는 사회적 차원에도 역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불의하게 생산되고, 불의하게 전달되며, 불의하게 분배되는 모든 종류의 먹거리에 대한 불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되고 제지되어야 마땅하다.


당연히 이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은 생존조차 힘겨운 농어촌 개 교회의 힘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고후 11:29) 온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토로하셨던 사도 바울의 이 심정은 바로 지금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도시의 교회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다. 교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듯이, 모든 교회 역시 성령 안에서 하나다.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픈 것처럼 농어촌 교회 없는 도시 교회만의 부흥은 언어도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는 보다 연합해야 하고 보다 협력해야 한다. 도시의 교회들과 농어촌의 교회들은 그렇게 서로 힘을 모아 하나님 창조의 마지막 뜻을 살리고, 생명과 창조의 유지 수단인 먹거리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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