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의 목적
독일식 교육을 받고 자란 아들이 며칠 전 신문기사에서 ‘토론대회 우승’에 관한 기사를 읽었던 모양이다. 아들은 그 기사를 읽은 얘기를 하면서 “독일과 한국이 이렇게나 다른가요?”라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토론의 목적이 이기는 거라고 가르치는 모양인데 독일에서는 토론의 목적을 타협점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쳐요. 토론의 목적이 논쟁으로 이기는 게 아닌데 토론대회라니...” 이기기 위한 토론과 타협점을 찾기 위한 토론, 아들의 말은 한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겪었던 모든 토론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상대방이 꼼짝 못할 논리를 펴서 상대방을 제압하고 결국 모든 것이 내 뜻대로 결정되고 진행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인 토론. 어느 집단에서든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목회자들의 모임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토론은 이기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하니 토론을 할 때마다 기를 쓰고 이기려 든다. 토론의 목적으로 타협점을 찾을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못 했으니 그 어떤 경우에도 토론을 통해 타협점에 이르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타협과 절충이란 쌍방이 어느 정도 내 것을 포기할 마음과 자세가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상대방과 나의 이익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토론은 이 이익의 부대낌을 인정하고 나는 어디까지 포기하고 상대방은 어디까지 포기해야 둘의 이익의 합이 최고가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리여야 했다. 독일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이렇게 배우며 자라고 있겠구나 생각하니 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에 부러움과 씁쓸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스라엘의 처음 왕 사울의 말년은 비극적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기름을 부었던 사무엘은 끝까지 그에 대한 애정을 놓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사울과 선을 그었을 때조차 사무엘의 마음은 완전히 사울을 버리지 못했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다.”(삼상 15:35) 사무엘의 이런 태도는 단지 자신의 손을 통해 임명된 왕의 몰락에 대한 미련이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 사울을 만났을 때 사무엘은 이 미래의 왕과 밤이 맟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었다.(삼상 9:25-27) 무슨 말을 나누었을까? 아마도 이스라엘의 첫 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보이는 인간적 힘을 의지겠다고 왕을 바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비난했던 사무엘은 분명 하나님의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왕이 필요한 상황을 역설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옥상의 긴긴 밤은 둘 사이에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고 마침내 절충과 타협이 이끌어졌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상상이기는 하지만, 그 토론과 타협이 앞으로 두 사람의 평생을 이어줄 질긴 애정의 끈으로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둘의 입장은 분명코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어떤 식으로든 결국 타협과 절충을 이루어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 격한 토론이 끝나고 난 후에도 둘 사이엔 증오가 아니라 애정이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승리는 적을 만들 뿐이지만 타협과 절충은 동지를 만든다. 우리 사회에서, 또 우리 교회에서 이제는 승리를 위한 토론이 아니라 타협을 위한 토론이 서서히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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