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령 편지 - 느린 걸음(20160906)
한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이제 완연한 가을 날씨가 되었습니다. 진부령은 지난주 내내 구름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인제에서는 분단의 상징인 DMZ와 접경지역인 일원 근처에서 열리는 제1회 세계청소년도로사이클 대회인 「Tour de DMZ 2016」가 열리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진부령도 행사 진행을 위해 오전에 두 시간 교통통제가 있어서 아이들과 구경을 하였습니다. 진부령 정상에 자전거들이 즐비하게 서서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근래 들어 도보여행이나 자전거 여행과 같은 느린 여행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마친 이들을 기념하는 공원이 있는 진부령도 도보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10월 16일에는 고성군 진부령 일대에서 제1회 고성 진부령 힐클라임대회도 있다는 공지가 보입니다. 고성종합운동장에서 진부령미술관까지 이어지는 이 행사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진부령미술관에서 대각선으로 보이는 저희 교회에 들리시면 시원한 냉수 한 잔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금요일 출근길에 진부령에서 용대리로 내려오는 길에 한 여성분이 우산을 접어서 들고서 걷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나이에 짐은 없는 운동화 차림이었고 한 손에는 긴 우산을 들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을 만 3일 만에 봉포 근처에서 보았습니다. 여전히 접어 든 우산을 쥐고 씩씩하게 걷고 계셨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걷고 있는 그 분이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작년 겨울에 제 사무실에서 일하던 학생이 졸업을 하고 일본으로 대학원 진학을 위해서 떠났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나라에서 공부하고 원하는 삶을 펼치기 위해서 다른 친구들이 취업처를 찾아 떠나는 동안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힘든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이 학생이 홀연히 한국에 귀국해서 찾아왔습니다. 대학원 시험은 아쉽게도 떨어졌으며,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두어 주를 쉬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랍니다. 그래도 일본에서 아르바이트 시급은 현실적인 수준이어서 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은 없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그곳에서 터를 닦을 예정이니 한 두 번의 낙방 정도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은 정부에서도 청년들의 해외 취업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들도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합니다. 좀 더 자유롭게, 좀 더 공평하게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이 살아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가야 했던 시절이 있었고, 꿈을 이루기 위해 유학을 다녀와야 하던 시절이 있었고, 꿈을 이루기 위해 자격증을 따야 하는 시절이 있었고, 그리고 지금은 이 모든 조건이 별 의미가 없어지고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서 새로운 조건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청년들의 고달픔이 어디 청년들만의 몫이겠습니까? 청년들의 삶은 부모에게도, 다가올 미래세대에게도 표지석입니다. 최근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시집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7년간 한 누리꾼이 꾸준히 뉴스기사에 대한 댓글로 쓴 시를 모아 만든 시집입니다. 시집의 제목으로 선택된 시는 당진에서 20대 철강업체 직원이 용광로에 빠져 숨진 안타까운 사연을 두고 쓴 시입니다. 읽다보면 눈물이 절로 납니다. ‘이런 일도 있었구나’하고 당시에는 큰 화제였지만 금세 잊혀져버린 사건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망각의 속도가 기억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조금 느리게 걷고, 조금 느리게 잊고, 조금 느리게 기억하고, 조금 느리게 판단한다면 조금 더 꼼꼼하고 바르게 삶을 다듬어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래 기다리시는 하나님처럼, 여러 번의 실수에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처럼, 저 자신을 다그치기 보다는 걸어서 산을 넘는 마음으로 지치는 몸은 당연히 생각하고 부르트는 발은 다시 동여 메면서 오늘 하루의 삶을 걸어갑니다.
아픔이 많은 세상이지만 포기하지 않는 청년들에게서 희망을 얻고 느리게 걸어가는 여행자들에게서 여유를 배웁니다. 이 모든 것이 진부령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하루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홍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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