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와 아니오
흔히 “나치 경례를 거부한 남자”(Guy Who Refused To Give A Nazi Salute)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역사적 사진이 있다. 사진의 주인공은 아우구스트 란트메서(August Landmesser), 그는 히틀러 집권 당시 함부르크 조선소의 노동자였다. 1936년 그가 일하던 조선소에서 군함이 완성되고 히틀러가 진수식에 등장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오른 손을 앞으로 내미는 나치식 경례를 히틀러에게 바쳤다. 그런데 바로 이때 수많은 군중을 찍은 사진 속에서 유일하게 팔짱을 끼고 경례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우구스트 란트메서였다. 란트메서는 1931년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나치당에 가입했었으나 1935년 유대인 여성과 약혼한 후 나치당을 탈당했다. 그 후 유대인 아내로 인한 많은 핍박이 있었고, 아내뿐 아니라 란트메서 자신 역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그는 끝까지 아내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험난한 인생사 속에서도 사랑과 신념을 배신하지 않았던 란트메서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유일하게 히틀러에 대한 경의를 거부했던 자신의 행동으로 그렇게 역사가 되었다. 그는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아니오’라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예와 아니오에 관하여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 5:37) 예 할 때는 예, 아니오 할 때는 아니오,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온다는 주님의 말씀. 하지만 이 단순한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상황은 예라고 말하는 상황보다 쉽지 않고, 게다가 그것이 특별히 다수의 사람이 예라고 말하는 자리에서라면 그 어려움은 절정에 달한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상황에서, 여기서 아니라고 말한다면 분명히 모두의 불편한 이목을 끌게 되는 상황에서, ‘아니다’라고 말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더 나아가 그렇게 하지 못 하는 상황에 대해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대개 용기가 없어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님은 달리 말씀하신다.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언제나 그렇듯 예수님의 말씀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식이 없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고, 생명을 구하지 않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는 말씀처럼(막 3:4) 우리 주님은 언제나 극단적이시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윤리에는 중간지대란 없다.
나치 경례를 거부한 남자는 모두의 신념에 반하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그 대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터였지만 그래도 그는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했다.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단순함,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언젠가 언급했던 얀 후스의 부정적 예에서와는 다른, 진정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거룩한 단순함일 것이다. 우리의 삶이 갖추고 회복해야 할 그런 단순함일 것이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이나 땅이나 그 밖에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다만, ‘예’ 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예’라고만 하고, ‘아니오’ 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아니오’라고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약 5:12)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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