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혀 들어간다는 것
정답이 없다고 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해답이 없어도 생은 지속된다. 어떤 이는 망각의 기법을 동원해 인생의 의미 물음을 던지지 않고 사는 길을 택한다. 해야 할 많은 일들이 그로부터 '의미 물음'이 주는 불편함을 소거해간다. 하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심연에 숨겨진 어떤 핵심과 만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정신이 큰 사람들은 모두 무의미의 심연 혹은 영혼의 어둔 밤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존재 망각의 길이나 영웅적 정신의 길을 단호하게 추구하기 어려운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종교학자인 정진홍 선생은 "인간이란 희망이나 절망의 이원론적 서술을 벗어나는 다른 범주를 마련해야 비로소 서술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청계천이 피난민들의 거주지였던 때의 한 일화를 들려준다. 어느 날 그는 옷을 수선하기 위해 얇은 널빤지를 얼기설기 엮어 바닥을 만들고 두꺼운 종이상자로 벽을 세우고 그 한 부분을 잘라 창을 만든 허름한 집에 들어섰다. 엉성한 마룻바닥 밑으로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띈 것은 창턱에 놓인 녹슨 깡통이었다. 깡통에는 채송화가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그 때의 감동을 이렇게 전해준다."저는 그 아주머니께서 길거리에서 깡통을 주워 거기 구멍들을 뚫고 흙을 담고, 어디서 얻으신 것인지 채송화 씨를 뿌리고, 그것을 정성스레 양지 볕에 놓고 물을 주고 키워 마침내 노란 꽃이 피었을 때, 그때 당신이 그 꽃에 담았을 온갖 삶의 애환과 그 꽃에서 피어났을 당신 삶의 추억과 꿈을 어떻게 숨 쉬셨을까 하는 것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습니다."(정진홍,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청년사, p.412-413)그 아주머니는 궁핍한 시대를 멋지게 살아낸 삶의 시인이 아니었을까? 정진홍 박사는 그 때부터 그 꽃과 아주머니는 아름다움과 진실함과 착함을 가늠하는 잣대처럼 당신 안에 머물고 있다고 고백한다. 새로운 범주가 마련된 것이다. 기로망양岐路亡羊이라는 말이 있다. 갈림길에서 양을 잃었다는 말이다. 양을 우리가 붙들어야 할 생의 본질적 가치라고 한다면 수없이 많은 길이 교차하는 길목에서 우리는 그 양을 잃어버리기 일쑤이다. 그럴 때일수록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필요와 충족, 욕망과 쾌락의 원은 그의 실존의 모든 것을 담기에는 너무나도 좁다"((<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 4월 20일, p.56)고 말했다. 인간에게는 그런 것들로 충족될 수 없는 목마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알든 모르든, 우주적인 연극의 한 역을 맡는 것"(앞의 책, p.65)이라고 말했다. 정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한 방법은 누군가와 기꺼이 얽혀들어가는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은 참 난해하다. 누군지도 모르고, 언제 온다는 기약조차 없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막연히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쓸데없는 말장난을 해보기도 하고, 신을 벗으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무에 목을 맬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는다. 앞을 못 보는 포조라는 인물의 외침인데, 그 소리를 듣고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블라디미르는 고민을 하다가 에스트라공에게 말한다.공연한 얘기로 시간만 허비하겠다. (사이. 열띤 소리로) 자, 기회가 왔으니 그 동안에 무엇이든 하자. 우리 같은 놈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항상 있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지금 꼭 우리보고 해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놈들이라도 우리만큼은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보다 더 잘할 수도 있을걸. 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들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베케트, 133쪽)살려달라는 포조의 외침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대상은 동물이 아닌 사람일 테니까 인류를 향한 외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둘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싫건 좋건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쓰러진 사람 앞에 그들은 인류의 대표로 서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베케트가 암시하는 희망을 본다. 그는 삶의 무의미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누군가를 돌보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누구를 돌보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을 때이다. 진정한 경건은 돌봄으로 표현된다.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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