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한 어떤 정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도둑질을 한다거나 거짓말을 하는 그런 것이 죄가 아니었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죄를 정의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상징이나 은유가 사용되곤 한다. 사람들은 언어적 근원을 따져 과녁으로부터 빗나간 활을 사용해 죄를 표현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명예훼손과 관련지어 신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주기도문에서처럼 빚의 메타포도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일본의 대표적 기독교작가 엔도 슈사쿠는 그의 작품 <침묵> 속에서 무심히 흘러가는 사건의 묘사 가운데 죄를 위의 말과 같이 정의했다. 이 장면은 일본 관리에게 사로잡힌 선교사 신부가 오두막에 갇힌 채 자신을 지키고 있는 파수꾼들을 바라보는 대목이다. 파수꾼들은 앞으로 닥칠 신부의 운명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잡담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신부는 바로 그들의 모습에서 사로잡힌 예수를 곁에 두고 불가에서 웃고 떠들던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어쩌면 이다지도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 문학가가 죄를 떠올린 대목은 바로 이곳,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그리고 그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죄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설파한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다고.
사람 인(人)이라는 글자를 두고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존재로 인간을 설명하곤 한다. 인간이란 그 누구도 다른 인생과 겹침 없이 홀로의 인생을 경영할 수 없는 존재다.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타인과 탯줄로 연결되어 있던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탯줄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다시 관계라는 무수한 무형의 선들로 타인과 얽히게 된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알든 모르든 타인과 무수히 연결되어 있는 존재. 그렇다면 죄의 가능성은 이미 편만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수히 서로 얽혀 통과해가는 인생들은 타인의 삶에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으며, 내 인생 또한 무수한 타인의 흔적이 남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마치 대도시 아스팔트 위에 갓 내린 흰 눈 위로 어지러이 겹쳐질 무수한 흙발자국처럼 우리는 서로의 인생길에 어지러이 끼어들고 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도치 않은 상처’라는 흔해빠진 상투어야말로 이 사정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이 아닐까?
2014년 11월 집을 비워달라는 통고를 듣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독거노인은 각종 공과금과 장례비용까지 남겨 놓고는 따로 봉투를 마련해 10만원을 넣어두고 그 봉투 위에 이렇게 써 넣었었다. “고맙습니다. 국밥이나 한 그릇 하시죠.” 노인은 그 아랫줄에는 더 큰 글씨로 이렇게 적었다. “개의치 마시고.” 그것은 자신의 시신을 수습하게 될 사람들에 대한 배려였다. 개의치 마시고... 노인의 이 마지막 말은 지금도 여전히 먹먹한 울림을 준다. 내 인생을 불가피하게 통과하게 될 다른 인생에 대한 의식과 배려는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것이다.
신앙의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불가능할뿐더러 행여나 그것을 시도하는 인간을 헛된 영적 교만에 빠지게 만든다. 신앙의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깨어있는 것이다. 내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의식, 즉 죄에 대한 감수성이다. 문학가는 바로 이 점에 대한 훌륭한 지침을 자신의 죄에 대한 정의를 통해 우리에게 선사한다. 죄에 대한 감수성을 예민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른 인간의 생을 통과하며 우리가 남긴 흔적에 민감하여야 한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과거에 대한 반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생을 통과하며 끊임없이 크고 작은 흔적을 남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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