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져짐과 던짐 사이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보편적 운명은 불안이다. 동생을 죽인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서 '놋' 땅에서 살았다. '놋'은 '떠돌아 다님'을 뜻하는 말이다. 정주하지 못하고 떠돈다는 것, 흐름 위에 보금자리를 치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홀가분하지만 동시에 불안정한 삶이다. 찰라의 불꽃처럼 번뜩이는 기쁨은 있을지언정 지속적인 평강은 언감생심이다. '안식 없음', '고향 상실'이야말로 인간의 운명이다. 삶은 익숙한 곳에서도 늘 낯설기만 하다. 어느 누구도 삶에 대한 영원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은 순간순간 삶의 의미를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시간이 혹은 우리의 외부 세계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는 한계가 뚜렷한 자유이다. 나의 자유는 너의 존재 앞에서 비틀거리곤 한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을 가리켜 '내던져진 존재'라 말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왔다. 우리 삶은 필연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자유를 선고 받았으나,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난 일들로 인해 우리는 부자유하다. 운명의 잡아당기는 힘 앞에서 어떤 이들은 속절없이 끌려가고, 어떤 이들은 그 힘을 거슬러가며 자기 삶을 기획한다.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기 삶을 기획하는 존재인 것이다. '던져짐'과 '던짐'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인간 존재의 운명이다. 그 흔들림은 존재론적 불안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불안하기에 사람들은 불안의 대용물을 찾는다. 돈과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기도 하고, 늘 새로운 것에 몰두함으로 존재의 불안을 잊으려 한다. 하지만 '존재'가 아닌 '존재자들'은 우리 영혼에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늘 새로운 목마름을 안겨줄 뿐이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이성 3부작은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를 탐구한다. 그런데 이 세가지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관심한 것은 시민 사회 속에서 어떻게 손해보지 않고 자기 이익을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였지만,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 이래 철학의 과제는 인간 존재에 대한 분석에 바쳐졌다. 인간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20세기를 거쳐오는 동안 우리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탈리아의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그곳에서 겪은 비인간적인 현실을 글로 남겼다. 수용소에서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였다. 인간에 대한 모든 낙관론은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의 현실 앞에서 번번이 무너지곤 했던 것이다.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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