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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8-13 23:15
   
광복절에 부르는 망향가
 글쓴이 : dangdang
조회 : 276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15 [201]


광복절에 부르는 망향가


  어느 새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되었다. 카자흐스탄에 답사기행을 다녀온 것은 독일한인교회에서 목회하던 1999년 5월이었다. 교회에는 선교여행으로 보고했지만, 사실 고려인 역사답사였다. 선교 이전에 그곳에 사는 인간에 대한 탐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려인을 만나러 가기 전에 자료를 읽고, 생생한 삶의 전기들을 공부하였다. 신중신의 장편소설 ‘까레아인’을 침을 바르며 읽고, MBC 대하드라마 ‘카레이스키’를 밤을 새워 보았다.


  카자흐스탄에 사는 고려인은 10만 명 남짓으로 이웃 우즈베키스탄의 25만 여명과 비교하면 훨씬 적었다. 그럼에도 알마타는 옛 소련연방 어느 곳보다 고려인 사회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신문사와 극장 등 대표적인 기관들이 여기에 소재하면서 자치권이 없는 동포들에게 삶의 중심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전에는 연해주 곳곳에 400여 한인학교와 도서관, 문화단체, 신문, 잡지들이 존재했으나 끊임없는 탄압으로 이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고 했다.


  일주일 동안 알마타에 머물면서 신세진 몇 분을 한국음식점에 초대해 저녁 식사를 대접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고려일보사 양원식(미하일로비치) 사장을 비롯하여 고려극장의 김겐나지 극장장, 고려인문화중앙 김아가피아 부회장, 국립 카자흐대학 한국어학과 김필영 교수 그리고 임시정부 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의 손녀 이류드밀라 집사가 함께하였다. 그새 단골이 된 원동식당에서 불고기와 된장찌개 그리고 고등어구이로 입맛을 돋우었다.


  배가 부르고 분위기가 오르니 한민족 태생답게 서로 노래를 권하였다. 처음에는 러시아 민요를 불렀다. 아마 제2차세계대전 때 해방가처럼 불렸을 옛 러시아군가도 끼어들었다. 그들의 말은 서툴러도 러시아 로망스는 신비할 만큼 매력이 있었다. 우리 일행도 흥겹게 조용필과 주현미로 분위기를 살려나갔다. “고려사람 노래 좋아하고 춤 좋아하지 아이해요?” 생각해보면 그들의 노래는 무슨 노래를 부르든 망향가(望鄕歌)였다.


 
  늦은 밤까지 계속한 모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김겐나지 씨가 자기 집에 가서 더 이야기를 나누자면서 팔을 잡았다. 아내 문공자 씨는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고려인 가수로, 공훈배우였다. 출생과 성장은 사할린에서, 성악공부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그리고 가수활동은 알마아타에서 했다. 남편은 러시아인명사전에 등재된 연주자답게 기타연주를 하였고, 아내는 노래를 불렀다. 황홀한 한 밤의 콘서트였다. 문공자 씨는 몇 년이 흐른 후 한국으로 돌아온 내게 전화하여 “제가 인민배우가 되었습니다”라며 새벽을 깨운 적이 있다.


  문공자씨는 다른 고려인과 달리 유난히 한국말을 잘하였다. 일제 말에 사할린에 광부로 왔다가 강제 억류된 아버지 덕분으로, 여전히 사할린 동포들은 모국어를 잊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중학교까지 한국어를 배운다는 사할린 동포의 자손들은 옛 소련 연방에 사는 고려인 가운데 우리말을 가장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기에 러시아 곳곳에서 한국어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2007년 영구귀국자 447명을 제외하면 사할린 강제징용자 4만3천여 명은 아직도 그 땅에 남아있다(한국일보, ‘꿈 같은 귀국했지만... 우린 나라 없는 사람’, 2016.8.14).


 
  고려인은 1990년대 초 북방외교로 옛 소련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그 존재가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한국의 방송에서 앞 다투어 문화예술인을 초청하였고, 언론사들은 결연을 맺었다. 또 멀리 사할린으로 날아가 동포들을 대상으로 위문공연을 하였다. 아쉬운 것은 ‘그때 뿐’이란 점이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고려인 동포들은 잊혀진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해마다 광복절이 돌아오면 특집방송이든, 다큐멘타리든 겨우 구색 맞추기처럼 고려인들의 아픔은 재탕, 삼탕 소비될 뿐이었다.  


  어느 새 또 8.15가 찾아왔다. 우리는 일찍이 그 감격을 잃어버렸지만 고려인과 조선족, 이 땅을 떠나 사무치는 망향가를 불러온 해외동포들은 여전히 8.15의 광복과 귀향을 잊지 못한다. 평생 타향살이를 목메어 불러온 그들에게 광복절은 언제쯤 익숙해 질 것인가? 고려인을 답사하며 배운 것은 아직도 8.15의 감격세대가 세상 곳곳에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분단현실처럼, 광복절을 기념하는 우리 민족에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미완의 숙제임에 틀림없다.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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