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기에서 예수 살기로 3
예수, 다시 살아나다
하지만 십자가가 예수 운동의 끝은 아니었다. 예수는 다시 살아났다. 부활 사건은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건이기에 누구에게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물론 예수 시대 이전에도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셀류커드 왕조의 폭압적 지배가 유대인들을 괴롭힐 때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어간 이들의 운명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부활은 그처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제시되었다. 그렇다면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자칫 잘못 다루면 오해의 소지가 큰 미묘한 문제이다. 하지만 저자는 부활에 대한 질문을 바꿀 것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예수가 정말 부활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살아 생전에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은 예수가 부활했느냐"(229).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부활에 대한 가르침의 전통에도 부합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불의한 권력자들에 의해 박해받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실천했던 예수이다. 그를 죽이려는 이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끝끝내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예수이다. 그런데 그 예수는 정말 몸으로 부활했는가? 저자는 이 질문을 애매한 태도로 회피하지 않는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라는 '개별자'의 부활이 아니라 그의 길을 이어가는 제자들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던 제자들이 일어나 예수가 가르치고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를 다시 가르치고, 병자들을 치유하고, 식탁 공동체를 이루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저자가 이해하는 몸의 부활이다. 예수 정신이 제자들의 삶을 통해 온전히 육화되는 것, 바로 그것이 부활이라는 것이다(242).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지만 저자는 아주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 역사 안에서 예수의 부활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예수가 교회 회의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외아들로, 급기야는 하나님으로 고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니케아 회의에서 예수와 하나님이 동일본질이라는 고백에 당도했음을 잘 알고 있다. 저자는 이런 급격한 변화가 황제의 야심과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황제를 보좌하고 있던 호시우스는 '두 주님설'로 황제를 설득한다. 이 세상에는 동등한 자격의 두 주님이 존재하는데, 한 주님은 종교계를 다스리는 예수이고, 다른 주님은 정치계를 다스리는 황제라는 것이다(271). 예수에게 신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곧 황제의 신적 지위 획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자 황제는 니케아 회의에서 그런 결정을 종용했고 마침내 관철시키고 말았다. 기독교는 이제 제국 종교가 되었다.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박해하는 기독교로 변신한 것이다. 기독교가 노정하는 배타주의와 개종주의의 씨앗은 이렇게 파종되었다(276-7). 하나님으로 높여진 예수는 이제 경배의 대상이지 더 이상 따라야 할 생의 모범이 아니었다.
9장에서 이 책의 목표가 무엇인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경배의 대상이 된 예수를 이제 본래의 자리인 지상으로 모시자는 것이다. 신적 휘장에 가려졌던 예수의 본래 모습을 회복함으로 우리들의 비근한 일상 속에서 늘 만나고 여쭐 수 있는 선생으로 삼자는 것이다. '참 하나님, 참 인간'이라는 교리에 충실한 이들은 예수를 선생으로 삼자는 말에 당황스러워 할 것이다. 예수를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와 같은 스승의 반열에 세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선생'을 앞서 난 사람이 아니라 '앞서 걸은 사람'이라 말한다. 진리의 길을 우리보다 앞서 옹골차게 앞서 걸어간 예수는 어떤 분인가?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조건을 갖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한계 속에서 태어난 보통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는 참 인간, 참 세상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 "예수는 참 인간, 참 세상에 대한 비전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어야 한다", "예수는 참 인간과 참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르친 그대로 살았어야 한다", "예수는 가르친 대로 살아온 그 삶을 죽는 그 순간까지 끝까지 지켰어야 한다"(286-7). 예수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선생이다. 그러나 우리와의 차별성은 없는 것일까? 누구도 예수처럼 살 수 있지만 실제로 예수의 삶을 오롯이 살아낼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당혹스러운 이들이 많을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통해 역사적 예수의 실체에 접근하려다 보니,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은총'과 '신비' 그리고 '역설'에 대한 논의가 소홀히 된 느낌이 있다. 예수 살기를 강조하는 동시에 구원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남겨진 과제라 하겠다. 비기독교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고는 하지만 기독교 대중들에게 구원의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학문적 저술을 의도하지 않는다. 마치 대중강연처럼 느껴지는 것은 글의 초고를 작성한 후 대중들과 독회를 반복하면서 수정 과정을 거쳤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의 초상을 그리려던 저자의 계획은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경배의 대상으로 높여짐으로써 정작 우리 삶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역사적 예수를 우리 삶의 자리에 다시 초대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예수의 길벗이 되어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다양한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끝>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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