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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22]
 
 
 
     
 
 
 
작성일 : 16-07-31 00:15
   
예수 믿기에서 예수 살기로 2
 글쓴이 : dangdang
조회 : 322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944 [214]


예수 믿기에서 예수 살기로 2


예수의 삶의 자리


역사적 예수를 괄호 속에 묶어 제거한 결과 한국교회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나는 배타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결핍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역사적 예수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1980년대에 '예수 세미나'를 이끌었던 로버트 펑크도 이 점을 정직하게 시인하며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 뿐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예수가 기원 전 6년이나 7년에서 36년 사이에서 살았을 것이라는 것, 그의 활동기간은 1년 내지 3년의 짧은 기간, 고향은 이스라엘 북부에 있는 갈릴리 나사렛, 활동 장소는 이스라엘, 아버지는 목수이거나 장인, 어머니는 마리아, 형제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네 명, 거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누이 두 명, 모국어는 아람어(Aramaic)이고 아마도 그리스어를 말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 세례요한의 문하생으로 있다가 그의 죽음 이후 가르치고 치유하고 공동식사를 행했을 것이라는 것, 그의 주변에 시몬 베드로, 세배대의 아들들, 헤롯대왕, 헤롯 안티파스, 빌라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는 것 정도가 그것이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에 대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저자는 예수의 삶의 자리부터 살핀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규정했던 것은 유대교와 로마의 식민 지배 그리고 로마의 하수인인 헤롯 왕가의 전횡이었다. 유대교 갱신 운동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성전 체제는 민중들의 일상적 삶과 유리되어 있었고, 소위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의 평화가 사람들의 삶을 옭죄고 있었다. 로마에 부역하는 헤롯 왕가는 재원 마련을 위해 가혹한 세금 정책을 펼쳤고, 총독이 다스리고 있는 예루살렘 인근 지역 사람들도 제국세(토지세, 수확세, 관세, 통행세, 연공 등)에 시달렸다. 여기에 사람들이 성전에 바쳐야 했던 종교세를 더하면 세금은 대략 수입의 35%가 되었다고 한다. 소작민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그로 인해 향촌 사회는 급격히 해체되었고, 갈릴리를 비롯한 농촌 지역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바로 그런 현실에 비춰볼 때 그 의미가 오롯이 드러난다. 저자는 "안티파스의 통치기간 동안 갈릴리의 소작농들에 대한 경제적 수탈은 예수의 대안적 '왕국'(alternative kingdom) 운동의 배경"이 되었을 것(97)이라는 넬슨-폴마이어의 견해에 공감한다.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듯 죽은 후에 가는 나라가 아니다. 그곳은 이 땅에서 경험해야 할 새로운 현실이다.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도래하는가? 하나님 나라를 추동하는 주체는 하나님인가, 인간인가? 저자는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 참여와 협력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다"(99)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열린 미래로서 과정 속에 존재한다(104). 하나님 나라는 강자들의 폭력이 정상으로 용인되는 사회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검질기게 노력하는 이들을 통해 서서히 다가오는 현실이다.

 

제국의 지배에 맞선 하나님 나라 운동


앞서도 말했듯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다. 대체 어떤 삶과 어떤 가르침이 그렇다는 말인가? 저자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가 주목하지 않는 예수의 삶에 주목한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던 것 세 가지는 질병, 기아,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었다. 예수는 그 세 가지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공권력의 폭력과 착취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빈곤은 영양실조를 낳고, 영양실조는 면역력 결핍을 낳고, 면역력 결핍은 질병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질병은 개인 위생의 문제가 아니고 구조적 문제이다. 환자 치유의 자리가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는 자리가 되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자리이기도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129).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예수가 기아 문제를 전면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하지만 치유의 현장이 때로는 밥상 공동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저자는 크로산의 견해에 의지하여 말한다. "예수는 질병에 걸린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해 주면서, 그 환자와 가족들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는 대신, 환자와 그 가정은 예수와 그의 일행, 그리고 예수를 보러온 그 지역의 배고픈 청중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130). 치유에 대한 감격이 빚어낸 "공동 식사 자리는 계급에 의한 차별에 도전하고, 평등 사회를 구현하는 자리"(132)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과 헤롯의 지배가 폭력에 의지하는 것이라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것이어야 한다. 로마의 폭력적 지배에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더 큰 폭력을 초래하는 일임을 예수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렇다고 하여 강한 자들의 폭력 앞에 비굴하게 굴종할 수도 없다.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폭력을 추문거리로 만들 수 있는 내적 능력이다. 비폭력 저항이 의도하는 것은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원수 사랑이 아니겠는가.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예수의 십자가가 비폭력의 전형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폭력과 착취에 근거한 로마식 삶의 방식과 성전체제에 반대한 예수에게 세상이 안겨준 것은 십자가였다. 예수는 한 사회의 안정성을 토대로부터 뒤흔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기득권자들은 사회의 맨 밑바닥에 사는 이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예수는 당시 세계가 설정해놓은 모든 경계선들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거룩함과 속됨,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의 구별 혹은 차별은 그 앞에서 다 무너지고 말았다. 어디서든 당연의 세계에 물음표를 붙이는 행위는 불온한 행위가 아니던가.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로마 제국은 예수를 제거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저자는 마커스 보그의 견해에 동조하면서 "'예수의 죽음은 십중팔구 유대교 종교지도자들과 관료집단...의 협의체(산헤드린, 필자주)와 로마 총독이 공모한 결과'였다고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옳은 판단일 것"(206)이라고 말한다.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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