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지난 주일 진부령에 김수진 찬양사역자가 다녀갔습니다. 군부대의 교회와 민간인 교회에서 아름다운 찬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흘리마을에 교회가 세워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어서 교인들의 기쁨도 더했습니다. 목소리를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밝은 얼굴을 보며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가’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았습니다. 연약한 믿음 부족한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가는 이 삶이 가장 복된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중에 두 아이가 심심해 하여 ‘쥬토피아’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세상에 둘 도 없는 조화로운 도시 쥬토피아에 처음 발령을 받은 경찰학교 수석 졸업생 토끼가 포식동물들이 맹수로 변해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범인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가 주요 줄거리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 포인트는 쥬토피아는 포식자와 피식자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동물들의 유토피아와 같은 도시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 포인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고 여린 동물 토끼가 받은 첫 업무는 교통단속이었다는 점입니다.
민주적인 유토피아에서 포식동물인 사자 시장은 피식동물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 양을 비서로 채용을 합니다. 양은 왜 사자가 자신을 채용했는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유토피아 모든 사건의 열쇠는 이 양이 쥐고 있었습니다. 동물들을 소재로 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익살스럽고도 예리하게 꼬집어 주고 있는 영화여서 저와 남편도 아이들이 잘 보고 있는지 확인한다는 것이 끝까지 같이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쥬토피아처럼 동물들을 소재로 하여 쓴 유명한 정치우화인 동물농장이 생각이 났습니다. 물론 쥬토피아와 동물농장은 결말도 다르고 이야기 구성도 많이 다릅니다. 쥬토피아는 포식동물과 피식동물이 서로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동물농장은 인간과 동물(돼지)이 그들이 차지한 상류 계급 안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의 말미에는 부패한 돼지들과 인간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설 동물농장에서 동물들은 자유를 위해서 인간을 몰아내고 동물농장을 건설하지만 혁명을 이끌어 낸 지도력을 가진 돼지들 간에는 이견이 있었으며 결국은 힘이 센 쪽(나폴레옹)이 힘이 약한 쪽(스노우볼)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습니다. 아쉽게도 힘이 센 쪽은 다수의 동물들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혁명을 통해 평등한 사회를 이루고자 했던 동물농장의 7계명은 시간이 지나면서 교묘하게 변합니다. 오직 더욱 많은 권력과 부를 누리고자 하는 소수의 돼지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라는 계명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몇몇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로 바뀌었습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미워하던 인간과 거래를 시작하고 급기야는 동료인 말을 인간의 도축장에 팔기도 하면서 기득권 돼지들은 자신들이 마실 포도주를 샀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자신들이 축출한 스노우볼 때문이라고 적을 규정해 놓았습니다. 돼지들의 뜻에 반하는 동물들은 스노우볼과 내통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죽이기도 합니다.
스탈린 시대 전체주의 소련을 배경으로 한 동물농장은 역사적인 정황과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한 조지오웰을 이해할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만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읽어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을 위한 소설입니다. 우리는 소설 안에서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는 돼지(나폴레옹)의 추한 민낯을 가감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정면교사이든 반면교사이든 이런 우화들은 우리의 현실에서 누군가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쥬토피아의 토끼는 시행착오를 겪고 문제를 해결한 경험을 통해 쥬토피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자신의 기대는 잘못된 것이었으며, 모든 동물들은 서로 다르고, 그 안에는 항상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 다름 안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은 서로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믿음의 사람들 모두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동요하지 말고 푯대를 바라보며 걸어가야 합니다. 이 땅에 왕으로 오셨지만 제자들이 기대하던 세상의 왕이 되기를 거절하신 예수님, 동물농장의 돼지들(나폴레옹)이 꿈꾸던 타락한 욕심을 거절하신 예수님, 그리고 모든 이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우리의 왕은 이런 분이셨습니다.
이 땅의 어떤 문제도 ‘저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저들’과 ‘우리’사이의 공통점을 찾고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를 ‘저들’의 문제라고 등한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시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기꺼이 모든 인생의 질고를 짊어지고 가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홍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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