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을 노래하라
독일에서 청소년 입교교육을 할 때 마지막 수업 과정으로 부퍼탈(Wuppertal)에 있는 바르멘(Barmen)을 방문하곤 했다. 1934년 5월에 행한 고백교회의 유명한 바르멘선언 현장이다. 토요일 오전에 복흠에서 지역 기차를 타고 여행하듯 찾아갔다. 그곳은 아이들이 학교교육으로 더 잘 알고 있는 나치 시대와 맞섰던 본회퍼 목사를 기억할 수 있는 현장이다.
처음 의기양양하게 찾아갔을 때 바르멘 게마커교회에는 어떤 역사적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전통을 자랑할만한 유산일텐데 아무런 기억장치가 없다는 것이 의아하였다. 물론 찾지 못한 까닭은 조금 떨어져서 바라봐야 할 것을 코앞에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했기 때문이다. 교회 앞으로 나서면 사람들 붐비는 시장통 삼거리에 어린이 키 만 한 높이의 청동조형물이 있었다.
자칫 무심히 지나칠 만큼 낮은 높이였다. 동네 사람들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기념물이 무엇인지 모를 듯하였다. 행인은 대부분 무표정하게 오고 갔으나 우리는 대단한 발견이나 한 양, 앞뒤를 살피고, 새긴 문장을 읽고, 사진을 찍었다. 아마 거대한 광고판 같았다면 쉽게 관심이 멀어졌을 텐데, 너무 작아 오히려 반가웠다.
조형물은 작은 만큼 섬세하였다. 군중은 여러 줄로 나란히 서서 나치를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앞줄에 선 사람들일수록 열렬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맨 뒷줄에 있는 지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은 돌아서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함께 읽는 모습이다. 동상 아래 성경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당시 마르틴 루터의 독일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한 아들은 히틀러의 권력에 붙은 주류 교회였다. 나치는 뮐러 감독 등 교회 권력과 성직자들을 앞세워 그리스도교와 나치즘이 혼합한 독일국가주의교회를 만들었다. 교회는 나치 권력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나치 권력 안에 안주하였다.
그러나 다른 아들은 나치를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비록 소수의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교회 권력과 나치 권력에 맞서서 당당히 선언하였다. “우리는 교회의 선포와 교회의 질서가 각 시기를 주도하는 세계관, 당시 선호되는 정치 신념에 따라 변화해도 무방하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단죄한다”(‘바르멘선언’ 3항 중). 독일개신교회형제회의 선언은 독일 고백교회와 이후 독일개신교회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백교회 운동은 나치가 조작한 시대정신의 유혹에 반대하였고, 이에 기반을 둔 히틀러의 낙관론적 이데올로기에도 반기를 들었다. 사실 고백교회의 투쟁은 “히틀러 정권에 반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교회 안에 있는 파괴적인 힘에 반대한 것”(에드워드 드위)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성(城)교회 정문에 ‘95개 논제’를 내걸었다. 그가 쓴 대자보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으로, 신앙 권력의 심장부에 떨어진 시한폭탄과 같았다. 교황을 정점으로 한 세계관을 흔들었고, 중세기 천년 금기를 깨뜨렸다. 당시 면죄부 판매는 관행이었다. 남들은 모두 당연하게 여겼지만, 루터의 눈에는 하나님 믿음과 물질 숭배를 결합시킨 ‘두 주인을 섬기는 일’과 같았다.
2002년 노르트하우젠에서 만난 옛 동독교회 목회자들이 동독 시절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들 역시 루터와 고백교회의 후예들이었다. “동독 시대 때 교회의 유일한 자산은 믿음 그 자체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통일 이후에는 많은 자유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믿음은 적어졌습니다.” 박해가 사라진 대신 풍족한 물적 지원을 받지만, 이와 함께 더욱 마력적인 세속화와 다원화된 물질 문화적 풍토가 휩쓸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새 한국교회의 애창곡이 된 독일찬송 ‘주의 선하신 권능에 감싸여’(디트리히 본회퍼 시, 지그프리트 피에츠 곡)가 반갑다. 낯선 리듬과 예언자적 감수성으로 가득한 찬양을 부르면서, 더욱 낮고 조용히 우리 시대가 감당해야 할 구체적인 선한 의지와 개혁의 능력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