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츠, 그의 길을 간 사람
2022년 여름, 여전히 코로나 기간이어서 세상은 어디든 어수선하였다. 다만 독일 여행에서 마지막 일정으로 남부 프라이부르크를 방문한 것은 룻츠 드레셔(Lutz Drescher) 디아콘의 초대 덕분이었다. 그는 B&B 호텔에 방 하나를 예약하고 우리 부부를 기다렸다. 복흠에서 600킬로 떨어진 먼길이었다.
1992년 처음 만났으니 32년을 함께 하였다. 당시 한국 민중교회 목회자들의 독일교회 방문을 주선하고, 현장 프로그램을 기획하였다. 지금껏 내게 굳어진 독일 인상(印象)은 그 후 8년 반의 독일생활이 아닌, 겨우 3주간의 독일여행에서였다. 그만큼 난생처음 방문한 유럽은 신기루가 아닌 신세계였다. 이후에도 룻츠 디아콘과 서울은 물론 베를린, 평양, 심양 등 동서남북으로 동행하였다.
꼬박 이틀 동안의 만남은 지난 30년을 복기하는 기회였다. 룻츠는 프라이부르크 중앙역(Hbf)으로 작은 수레에 실은 24시간 호흡보조기를 착용한 채 등장하였다. 그런 상태로 나 보란 듯 당당하게 밀착 안내를 했다. 첫째 날은 옛도심을 구경하고, 쉬로쓰 산에 올라가 전망하였다. 저녁은 식재료를 사다가 그의 집에서 핏자팬쿠헨을 만들어 먹었다. 그가 자랑하는 볕이 드는 아주 작은 발콘에서 쭈그리고 앉아 수다를 떨었다.
이튿날에는 대성당을 구경하였는데, 가이드로 친절한 소녀를 소개하였다. 성공회 신부의 둘째 딸 도로티아인데, 인도 출신이었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소녀에게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미래의 연고(緣故)를 만들어주려는 심산이었다. 룻츠는 늘 사람에게 진심이었다.
오후에 완행기차를 타고 티티제(호수)를 방문한 일은 과거로의 여정과 같았다. 오고 가는 길에 룻츠의 고향 힘멜라이히(Himmelreich) 정거장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는 옛 추억을 말하며 들떠 있었다. 어린 시절 처음 교회 갔던 기억, 아이스크림을 사주신 목사님, 견신례를 한 소년 시절, 조부모와 부모님 그리고 동생과 장애인 조카가 묻힌 공동묘지가 있는 고향 풍경이었다. 그리고 젊은 룻츠는 프라이부르그에서 디아코니아대학을 마치고 인도로 떠난 후, 무려 47년 만에 고향 부근으로 귀향한 것이다.
룻츠는 저녁을 먹기 전에 내게 작별 선물을 주었다. 십자가 5점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조부이신 드레셔 목사님에게 물려받은 스탠드형 십자고상을 한국에 있는 내게 인편으로 보내 준 바 있다. 그런데 남은 십자가 전부를 내게 기증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즉석에서 룻츠 드레셔 컬렉션을 만들겠다고 다짐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십자가는 누런 천에 물들인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상이었다. 그가 1981년 세 번째 인도 방문 중 캘커타 마더 테레사 공동체에서 구한 예수님의 모습을 염색한 작품이다. 다른 4점의 십자가들도 모두 사연이 있었다. 그중 팔이 부러진 십자고상은 할아버지의 오두막에 걸려있던 것이란다. 낡고 퇴색한 십자가들은 그와 함께 세상을 유랑하던 끝에 이제 내게로 왔다.
염색한 예수님 모습은 그 배경인 십자가가 희미하게 느껴질 만큼 오랜 세월에 바랠만큼 바랬다. 놀라운 것은 그런 누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걸치신 두루마기 형태의 흰옷이 은은히 빛날 정도로 하얗다는 점이었다. 마치 표백한 것처럼, 어쩌면 늙은 룻츠의 소명이 여전히 빛 바래지 않았음을 웅변하려는 듯 느껴졌다.
엊그제 들은 룻츠 드레셔 님의 부고(訃告)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너무 갑작스러웠다는 서운함 말고는. 실은 갑작스러운 일도 아닌 것이 그는 이미 차분히 떠날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십자가 기증식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결혼을 안 했으니 자녀가 없고, 또 조카라고 삼촌의 유품을 소중히 여길 리 없다’고 말했다. 그날 밤, 막차를 타려고 전철역으로 뛰어가면서 연신 뒤돌아보았던 발콘에 선 형의 모습이 마지막이 되었으니, 몹시 아픈 일이다.
그는 1987년 한국에 선교사로 올 때 자신을 향한 뜻밖의 부르심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하나님께서 전화로 부르셨어요.” 독일 서남선교회(EMS)의 파송을 받은 그의 첫 결심은 “제국주의 앞잡이 같은 나쁜 선교사가 되지 않겠다”였다.
룻츠 형(兄)은 마침내 하늘의 전화를 받고 홀연히 떠나갔다. 흥미롭게도 그의 고향 이름 ‘힘멜라이히’의 독일어 뜻은 하나님 나라이다. 그가 정거장에서 낄낄거리며 이야기하던 어린 시절은 그에게 호기심 천국과 같은 세상이었는데, 이젠 진정한 본향 천국으로 떠났으니 이 또한 은총이다. 평소 강조한 “우리가 남에게 열려있지 않으면 하나님께도 열리지 못한다”는 그의 말처럼 하나님은 룻츠 형을 향해 그 품을 활짝 여셨을 것이 틀림없다.
송병구 / 색동교